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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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 / 시인. 수필가. 아동문학가   김익수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생각난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날따라 초여름 비치고는 꽤나 많이 내리고 있었지만, 받쳐든 우산도 없는 때라 홀딱 옷을 적시고 걸음 반 뜀 반 하면서 올레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때 빗속을 뚫고 바람타며 들려오는 고소한 향기와 맷돌돌리는 소리(고래고는 소리)가 귀와 코를 강타한다. 할머니가 선창하면 후창은 어머니의 몫이다. 이어 이어 이어도호라. 
고랫소리가 담아낸 걸작품이 바로 제주의 개역(미싯가루)이다. 
섬 속에 섬에서 밭을 갈고 씨앗 뿌려 노랗게 익은 보리쌀은 따스한 햇볕과 놀다보면 정이 깊어간다. 요새 아이들이라면 그렇게 고소하고 향기나며 맛있는 개역을 별로 먹으려하지도 않겠지만, 그 개역을 만들어주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이스크림이나 청량음료에 너무다 익숙해진 일상이라 개역을 탄 물 따위는 관심과 흥미를 보이지 않을테고, 구미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개역은 제주도에서 여름철 별미 가운데 하나였지만,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보릿고개엔 개역인들 풍족하게 만들었겠는가.   
집안에 보물 창고는 바로 고방이었다. 외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개역, 아무도 집에 없는 사이에 고방에 몰래 들어가 김이 빠진다고 봉해 놓은 개역단지를 꺼낸다. 
물도 없이 그대로 먹다가 목이 매여 내뿜는 바람에 그만 고방 바닥이 온통 개역으로 뒤덮혀져 뒤처리 하느라 걸레로 닦아 내는데, 땀께나 흘렸던 아름다운 추억이었으니. 다음날 들통이 났었지만, 외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흡족스러운 데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개역에 얽힌 속담이 있다. “정월초 하룻날 조캐역 도랭헌다”
여름철 별식이었던 개역을 만들게 될 때면 웃어른에게 절식(節食)으로 드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사이에도 고루 나누던 정이 있었다.
며느리가 제철에 ‘개역’을 만들어서 시부모에게 드리지 않으면 ‘보리 가루도 한 줌 주지 아니혼 메느리’ 라고 꾸중을 듣기도 했었던 은혜로운 보리철. 제주에 땅에서 나고 자란 보리. 보리가 담아낸 고소하고 향기로운 그 맛에서 어떤 여운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보지만, 풍토가 빚어낸 그 맛이 이제, 사라지는 것같아 어쩐지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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