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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그때는 정장이라 매일 와이셔츠 바람이었다. 단벌신사였지만 아내는 내 옷시중에 소홀한 적이 없었다. 칼같이 바지에 줄을 세우고 와이셔츠를 다림질했다. 와이셔츠는 사흘이면 빨고 다려야 한다. 지금도 놀라는 게 있다. 급하거나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있으련만, 긴 세월에 단 한 번도 내 옷 싸 들고 세탁소에 가 본 적이 없는 아내다. 6,70년대 교원 봉급이 6,7000원이었으니 가계를 꾸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던 때다. 아내는 근검으로 흔들리는 가정을 버텼던 우리 집안의 든든한 지지대였다.

회상하려니 아슬아슬한 게 또 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두 아들의 도시락 수발. 도시락을 열면 날마다 계란 프라이가 덮여 있었다고 돌이키는 50대 중반으로 기울어 가는 두 아들이다. 아내 마음속엔, ‘내가 가난해 못 먹으며 컸지만 내 자식들엔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결곡함이 있었으리라. 박봉에 시달리며 어떻게 그런 변통을 해댔던지 새어 나오는 게 감탄이다.

서울서 학원 강사 하던 시절, 내가 급성 폐결핵으로 숨 할딱이자 대뜸 ‘워낙 고기를 좋아하는 이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면 잘 먹여야 한다.’고 작심했던 모양이다. 반포에 살면서 마장동 우시장을 오가며 내가 좋아하는 내장을 사다 손으로 다듬고 씻어 가며 치다꺼리했다. 뉴코아백화점 앞에서 시내버스를 내려 아파트까지 가파른 길을 등짐으로 져 나르며 남편에게 먹일 푸짐한 소의 내장. 넙죽넙죽 받아먹어 병에서 빠르게 헤어나온 나. 용한 내과의를 만난 소중한 인연 못잖게 나를 기사회생케 한 아내의 손이 있었다. 날로 능숙해 간 아내의 치다꺼리하던 손놀림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세상이 변했다. 헌옷을 수선하느라 바쁘게 미끄러지던 재봉틀이 종적을 감추더니, 펑크 난 양말을 깁던 바늘도, 그걸 꽂아 두던 반짇고리도 여인들 언저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젠 할 일 없어진 아내의 손이 한가롭겠다 했더니, 일감을 찾아 다시 바빠졌다. 법화경을 사경하고 있다. 하루 한두 시간 거르는 날이 없다. 두 아들네와 손주들 무탈하게 해주십사 경전 한 글자 한 글자에 꾹꾹 눌러 축원을 새겨 간다. 옆에 사경한 책자가 높직이 쌓여 숙연케 한다. 늘그막을 아내는 불심으로 산다. 신앙으로 밝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면 덩달아 나도 마음이 편안하다. 이렇게 하자 한 바 없이 이렇게 늙어가고 있다. 둘 다 여든의 고갯길에 섰으니 이럴 때가 온 것이려니 한다.

하루 한 번 아파트 동 둘레를 돈다.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끼고 있어 걷는 게 즐겁다. 다섯 바퀴로 정했으나 몸에게 사정이 어떤지 물어가며 줄이는 경우가 잦다. 무리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걸 알아가는 요즈음이다.

이곳으로 이사와 3년차, 오른손은 지팡이를 짚고 왼손은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다. 평생 나와 아이들에게 헌신해 온 부지런한 일의 손, 고맙고 따뜻한 노작의 손, 기온이 내려가도 장갑 없이 외려 온기 고이는 마법의 손이기도 하다. 웬 자성(磁性)인가, 점점 꼬옥 잡는 손이다. 손가락이 뒤틀려도 내겐 보드레한 손, 섬섬옥수에 견줄 바 아닌 아리따운 손, 영원한 내 동반자의 손, 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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