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덜어내면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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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모든 색이 고열에 녹아 하나로 흡수될 때 흑이고, 햇빛에 흩어져 모든 색깔을 죄다 털어낼 때 백이다. 감정에 혹해서가 아니다. 본시 강건하매 명쾌한 것이 이 두 가지 색이라는 얘기다. 진리란 명제는 외곬, 흑장미를 고혹하다 말하듯, 백이라 백목련은 가장 청순할 수 있다. 오로지 흑이고 백이라 그런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일곱 빛깔 무지개가 아니라 정녕 흑이고 백이다.

오래전 선묘를 이장하며 보았다. 그 시절의 땅속 기억으로 오래 남는 것이 주검의 흰 뼈대였다. 흰 것은 고왔다. 더 고운 것이 있다. 아름드리 고목이 불타다 남는 숯덩이의 검정, 눈부시게 검어 더 태우면 다이아몬드다. 문장이 미학일 수 있는 것은 형용사와 부사가 아니다. 현란한 수식이 없는, 단지 그것뿐인, 참 담박하게도 주어와 서술어뿐인 그것이다.

흑과 백, 그중에도 나는 흑 쪽을 선호한다. 자연과 인생을 두루 섭렵하되 흑, 인간과 물상을 응시한 뒤 종국엔 이 하나에 통합하려는 것이다.

각종 인쇄물과 영상들이 현란한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시대다. 그런 가운데 외려 주목받는 색이 있다. 오직 명암으로만 표현하는 흑과 백. 화려한 색에 가려있는 본래의 메지지를 부각시키면서 보는 눈을 색으로부터 적당히 분리시켜 준다. 디자인이나 문화에 불어닥친 복고 열풍. 흑백에 정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요즈음이다.

애초 컬러로 제작된 영화를 굳이 흑백영화로 돌려놓기도 한다. 한국 영화 최초로 윤동주의 생애를 담은 영화 ‘동주’. 흑백영화로 촬영해 사실감의 획득과 더불어 시간의 역행을 현실화한 것은 대단한 성과로 평가될 것이다. 감독 말이 이를 환기한다. “우리는 이미 72년 전, 윤동주의 흑백 사진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걸 컬러로 살려내려 하면 오히려 사실성이 떨어진다. 또는 흑백영화가 갖는 노스탤지어라는 서정성에 대한 기대가 관객을 모을 것이다.” 흑백 화면에는 끈끈히 그것 특유의 정서가 녹아 있다는 얘기다.

흑백사진은 필터·포토샵에 효과를 주어 찍는 기법이다. 색채에 질리면서 소중한 사람과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일부러 흑백사진을 선호하는 흐름이다. 이를테면 기억 너머로 숨어들었던 아날로그적 감성이 고개를 쳐든 격이다. 빠르고 화려한 것만 고급스럽다고 해 온 사회적 취향이 과거에 대한 그리움, 느린 정서에 목말라 하는 역작용을 불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 두고 봐도 질리지 않고 인간 냄새가 나는 옛것에 대한 향수가 영화와 사진에서 현란한 색을 덜어내고 있는 것. 패션, 책, 고가의 가전제품, 자동차, 건물…. 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이 흑백 아닌가. 과연 검정이 고급스럽다.

흑백은 단조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럼으로써 더욱 그것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너나없이 알록달록 울긋불긋한 색으로 튀어야 한다는 세상에 흑백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진짜와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때문은 아닐는지. 시대가 온통 색으로 물들어 버린다 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것은 그대로다. 눈부시게 나부끼며 눈길을 끌지언정 색은 덜어낼 수밖에 없다. 결국, 남는 것은 빛이다. 흑과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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