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이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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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숙 / 수필가

봄바람이 부드러운 밤이다. 세수하고 거울 앞에 앉아 얼굴을 매만지는데, 웃음이 난다. 달밤에 소리 없이 피어난다는 복사꽃처럼, 내 얼굴에도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피어나는 검붉은 꽃들. 반갑지 않은 손님이 들이닥친 듯 당황스러웠던 그 날이 떠오른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 순간 깜짝 놀랐다. 하나둘 늘어나던 주름살과 흰 머리카락이 유난히 시선을 붙잡았다. 거울 속 얼굴은 내가 아닌 듯 낯설었다. ‘언제 이렇게….’ 게다가 얼굴과 손등에 번져가는 검버섯과 잡티들. 밤새 소리 없이 피어난 복사꽃이라면 어여쁘기라도 하련만, 나이 듦의 징표처럼 자리 잡은 것들. 왠지 씁쓸하고 쓸쓸했다.

젊은 시절에는 피부가 곱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민얼굴에 립스틱만 발라도 주위 사람들은 화장에 신경을 썼다고 여겼다. 나이가 들면서도 ‘피부가 고우니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라거나, 피부관리를 받느냐고 물어오는 이들에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입꼬리는 귀에 걸리곤 했다. 그들이 말하는 ‘백옥 같은 피부’가 나에겐 자기만족과 위안이었다. 그런 때가 엊그제 같은데….

9남매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왔다. 일머리 없는 내가 아뜩하게 맞았던 집안의 대소사들을 치러내려니 남모르게 속을 끓이는 일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시련들이 있겠지만, 내게도 풍랑을 건너는 돛단배처럼 위태로운 적도 있었다. 세월은 나라고 예외로 두지 않았다. 만물의 생로병사가 대자연의 이치라는 걸 알면서도, 거울 속 여인이 나라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흰머리와 주름진 얼굴, 화선지 물감 얼룩처럼 희미하게 번져가는 검버섯까지….

한때 아름드리 초록 잎을 드리웠던 나무 기둥에 군데군데 드러난 옹이 자국들과 앙상한 가지들을 보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혹독한 세월을 이겨내야만 했던 흔적들. 해가 갈수록 둥근 원을 그려나간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안에도 생의 나이테가 새겨지며 겉으로 드러난 것 같다. 나이테가 많은 나무일수록 꽃이 아름다운 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묵묵히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한 시인의 글이 떠오른다.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돌아보면, 나 역시 꽃을 피우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인생의 파고를 넘으며 4남매를 건강하게 키우고 출가시켰다. 이제 손자까지 일곱 명을 두고 60대 중반의 나이에 들었으니, 그동안 살아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증표처럼 점들을 표출해내는 게 당연하겠지. 흰머리와 검버섯이 검붉은 꽃처럼 피어나 마음이 서글프지만, 이 또한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삶인 걸 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 잡티가 마구 생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없는 사람들도 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젊음의 흔적들은 사라지는 게 당연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삶,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일 또한 멋진 일이리라.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가며 얼굴을 살핀다. 나이가 들었다는 걸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거울 앞에서 다시 한번 피식 웃는다.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겠는가.’ 주름지고, 검버섯이 올라온 얼굴이지만 아직 나는 한창 꽃의 한 생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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