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에 숭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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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동네 이팝나무에 꽃이 하얗게 피었다. 밥알을 닮았다는 꽃, 얼마 전 여행 중에 맛나게 먹었던 쌀밥이 떠오른다.

경기도 여주지방은 땅이 사질토로 비옥하고, 물이 풍부해 쌀 생산지로 천혜의 여건을 갖춘 곳이다. 예전에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이었을 만큼, 명품 쌀로 산업 특구 지정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부잣집으로 불리던 정미소가 드문드문 눈에 띄어 옛날 기억을 불러냈다.

유명하다는 쌀 밥집이다. 돌솥 뚜껑을 열자 자작자작 밥이 눌어붙는 소리가 시장기를 부채질한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을 대접에 퍼 놓고 숭늉을 끓이기 위해 물을 부었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맨밥을 한 숟갈 입에 넣자,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향이 입안 가득 번진다. 금방 지은 쌀밥은 찬이 없어도 좋다.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 김에 싸 먹는 것도, 제대로 맛을 즐기는 방법이다.

구수하게 끓은 숭늉을 후룩후룩 마시는데, 고단한 여독이 풀리며 몸이 나른하게 풀어진다. 벼농사를 지었던 고향 집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숭늉은 꽁보리밥에 진력이 날 즈음, 이른 햇벼를 거둬 햅쌀밥을 지었다. 뽀얀 쌀뜨물을 가마솥에서 푹 끓여내면, 걸쭉하고 구수한 맛을 어른들은 보약이라 했다.

이제는 식습관이 많이 바뀌었지만, 우리 식탁에서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게 밥이다. 한국인의 체질에는 밥심이 곧 건강을 지키는 잣대로 여긴다. 식량이 귀해 제대로 한 끼 쌀밥을 먹어보지 못하고 자란 세대를 넘어, 쌀이 남아도는 시대로 변했다. 요즘엔 밥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먹거리로 끼니를 채우는 시절이다.

일상은 선택으로 출발한다. 무엇을 먹어야 몸에 좋을지를 먼저 생각한다. 한 끼 잘 먹은 아침, 간소하게라도 배를 채우고 출발한다면 든든한 여유로 이어진다. 속이 비면 정신적인 해이가 올 수 있다.

몸에 물기가 마르는지 걸핏하면 갈증을 느낀다. 속에 냉기가 드는 것처럼 서늘해 따뜻한 물이 당긴다. 시중에 파는 누룽지를 사다 끓이기도 하지만, 일부러 압력솥에 밥을 눌린다. 몇 숟갈 남겨 따뜻한 숭늉에 밥을 말아 먹는 버릇이 새로 생겼다. 그렇게 해야 제대로 배를 채운 것 같은 포만감이 느껴진다. 음식점에서 한겨울에 냉수를 내오는 집은, 손님을 대하는 성의가 없어 보인다. 구수하게 끓인 보리차 한 잔은, 주인의 정성이 느껴져 음식도 덩달아 맛있게 먹게 된다.

날씨가 춥거나 비가 오는 날, 식후에 따뜻한 차 마시듯 숭늉을 마신다. 그럴 때마다 막내 고모가 떠오른다. 주전부리가 귀하던 시절이다. 가마솥에서 노릇노릇 누른 누룽지를 조그맣게 뭉쳐 건네주시던 거칠었던 손, 따뜻하고 인정 깊은 분이었다.

인성 좋은 이를 흔히 숭늉처럼 구수한 사람이라고 한다. 점점 사회가 각박해 간다. 나이 탓인지. 곁이 허전해 옛사람이 그립다. 나는 누군가에게 만나면 기분 좋고 편안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 그럴 사람이 곁에 있는지를 종종 되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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