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관통상 입고도 적과 끝까지 싸우다 숨진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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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6·25 참전 용사 한규택
 한가야, 재일동포 2세 피아니스트…독일 국립음대 교수 경력
 한국섭, 1947년 3·1 시위운동에서 주도적으로 학생들 지휘
 한규택, 인천상륙·서울탈환전 참전…100인의 호국인물 선정
 한만숙, 지식계층 포섭해 독립운동…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한문택, 일본 오사카서 전협 항일 활동하다 검거, 옥고 치러
제주시 일도2동 신산공원에 있는 6·25 참전 기념탑. 한규택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해병대 3기로 입대해 인천상륙전과 서울탈환전에 참전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한규택 상병의 공훈을 기려 1995년 4월 100인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제주일보 자료사진)
제주시 일도2동 신산공원에 있는 6·25 참전 기념탑. 한규택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해병대 3기로 입대해 인천상륙전과 서울탈환전에 참전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한규택 상병의 공훈을 기려 1995년 4월 100인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한가야韓伽耶:1958~?.

제주 출신 재일동포 2세 재독(在獨) 피아니스트이다. 1980년 제49회 일본 음악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했으며 제25회 파견 콩쿠르 마츠시타상(松下賞), 전독일 콩쿠르에서 수상했다.

이탈리아 비오티 국제 음악 콩쿠르 수상 외에도 제44회 주네브 국제 콩크르에서 1, 2위가 없는 3위(位)에 입상했다.

지난 1993년 제주 독주회를 시작으로 국내 연주 활동도 활발하다. 현재 독일 칼스루에 국립음대 교수로 근무했다.

▲한국섭韓國燮:1928(일제강점기)~?, 본관 청주, 민주청년동맹 간부, 조천면 함덕리 출생, 제주농업학교로 진학, 미군정기의 학생, 민주청년동맹 간부.

1946년 양과자(洋菓子)반대 시위운동을 일으키며 반미와 반미군정(反美軍政)에 학생을 이끌었다.

1947년 3·1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학생을 지휘했다. 3·1발포사건 이후 조선민족청년단(단장 이범석) 제주도당부에 위장 가입해 극좌운동을 전개했다.

1948년 4·3사건 이후 그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다.

▲한규택韓圭澤:1931(일제강점기)~1951(분단시대), 해병대 순국용사, 호국인물, 애월읍 상귀리(소웽이)에서 한자순의 차남.

1950년 6·25 발발 후 해병대(海兵隊) 3기로 지원 입대, 해병3기로 인천 상륙전과 서울 탈환전에 참가했다. 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한규택 상병의 공훈(功勳)을 기려 1995년 4월에 100인의 호국인물(護國人物) 중 한 분으로 선정했다.

한규택 상병의 묘는 애월읍 수산봉에 위치한 애월읍 충혼묘지에 안장, 또 모교 하귀교 교사 앞에는 호국용사 한규택 동상(銅像)이 세워졌다.

그는 해병 제3대대 제11중대 화기소대의 경기관총 사수였다. 이들 화기소대원 중에 제주 출신은 고지선(高智鮮·제주시), 김홍기(金洪基·남원면 하례), 김성택(金成澤·하례1리), 허경복(許京福·태흥), 진덕순(秦德順·중문리) 등이 있었다.

그는 1950년 11월 제3대대 11중대 화기소대 기관총 사수로 동양리(자개리)지구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이창환(李昌煥) 삼등병조(병장)의 장렬한 산화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지형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11중대는 대대 규모가 상회하는 적군에 밀려 눈물을 머금으며 진지를 버리고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11중대장은 제3소대에 엄호 임무를 부여하고 철수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소나기처럼 퍼붓는 적의 기관총으로 인해 철수가 어려운 상황임을 알게 된 3소대 기관총 사수인 한규택 상병은 이미 적탄에 찰과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한 상태에서도 적의 기관총 3정을 공격 목표로 정했다.

적의 기관총 한 정을 격파하고 나니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한규택 상병은 “아직 나에게는 오른팔이 있다”며 함성과 함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두 번째 기관총마저도 격파했다.

세 번째 기관총을 격파하려는 순간, 적이 쏜 탄환이 이번에는 한(韓)상병의 가슴을 관통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그의 임무를 부사수에게 부탁하고 말없이 눈을 감고 말았다.

주어진 임무는 아끼지 않고 완수하려는 한규택 상병의 책임 완수 정신은 지금도 전군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만숙韓滿淑:1920(일제강점기)~1993, 일본 ‘오사카’에서 계림(鷄林)동지회의 항일 활동, 본관은 청주.

한석범(韓錫範)의 아들로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제주공립농업학교 졸업하고 일본대학 부속 오사카(大阪)전문학교 특과 야간부에 재학했다.

그는 1942년 10월 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전수했다.

동지 김봉각과 함께 첫째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식계층을 포섭, 마르크시즘과 삼민주의를 중심 과제로 연구할 것 둘째, 일본대학 부설 오사카전문학교 관계자를 중심으로 멤버 획득에 노력할 것 등을 의논했다.

한만숙은 1990년 6월 15일 회장 김봉각을 50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했다.

김봉각은 조총련에 관여한 관계로 긴 세월 고향을 못 찾았고, 특히 1985년 부친이 별세한 때도 찾아오지 못한 상태였으며 김일성(金日成)으로부터 다섯 차례나 상봉하자고 제의해 왔으나 이 초청을 거절했다.

김일성 부자의 독재에 환멸을 느껴 조총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처음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김봉각은 사업으로 크게 성공해 일본의 정계·재계의 거물들과 교유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항일 운동의 옛 동지 김봉각과 한만숙의 50년만의 만남은 정말 감격이었으며 이후 둘은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해 모두 이승을 떴다.

한만숙은 1993년 3월 8일 건입동에서 사망한 후 대전(大田)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한문택韓文澤:1915(일제강점기)~1971, 일본 오사카에서 항일 활동, 본관은 청주.

구좌읍 종달리에서 한경도(韓京度)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8월 전협(全協) 화학노조 오사카지부에 가입했고, 1932년 11월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1933년 10월 3일 검거돼 12월에 기소, 1935년 9월 7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71년 5월 6일에 사망했다. 공산당 오사카 동(東)지구원 문서배포계에서 활동하던 중 후일 석방돼 오사카 동성구(東成區)에 사는 친형 한형택(韓亨澤)의 집에서 정양 중이었다.

그가 오사카에 있는 당원들과 어떤 접촉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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