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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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종이를 스토리텔링하다’는 이미 있습니다. 바꾸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자판으로 글을 쓰다가 종종 겪는 일이라, 조금 전에 쓴 것을 버리고 이제 고쳐쓴 것으로 바꾸겠느냐는 물음으로 생각했다. 늘 해오던 비슷한 상황이려니 한 것이다. 그러려니 해 “예”에 클릭했다. 찰나다. 화면이 하얗다. 25줄이었나. 졸지에 글이 사라진 것이다. 열 줄만 더 쓰면 퇴고에 들어갈 칼럼 초고. 아뿔싸,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두뇌 회전을 멈춰버린 의식 속에서도 머릿속에 낡은 현수막처럼 너덜대는 긴 제목.

반사적으로 휴지통을 뒤졌다. 없다. 행여나 하고 화르르 떠는 눈이 다시 수색에 나섰지만 허사다. 제자리로 돌아오니 내용이 송두리째 달아나 버린 파일 이름만 남아 있다. 조금 전 분명 쓰던 글이라는 뚜렷한 흔적이다. 별안간 내 글의 실종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돼버렸는데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 한동안 멍때리고 앉아 있었다.

최고기온 33도, 하지만 장마철 습도로 체감온도는 더 끓어올랐을 것이다. 13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나무들이 이파리 하나 옴짝달싹않고 장승처럼 서 있다. 사람을 혼쭉낸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바람 한 점 없는 7월 10일의 후텁지근한 불볕더위, 이 날씨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은 게 명확해졌다.

자연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만인에게 두루 공정하고 공평한 걸 왜 모르나. 날씨를 두고 투덜거리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다. 내가 앞뒤를 살피지 않고 절제하지 못해 빠져든 자기 함정일 뿐이다. 팔십 평생을 걸어왔지 않은가. 그리고 길 위에서 깨닫지 않았는가. 길을 걸을 때 철학보다 한 발짝 앞서 스스로를 가누게 해온 경험칙. 늘 다니던 길이라면서 내가 오늘 그 길을 간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었다. 삶 속에서 내 두 손으로 줍고 찾아냈던 크고 작은 터득들….

몇 번인가 겪었던 일이다. 글은 벽돌을 얹는 게 아니다. 쓰다 사라진 글을 다시 쓰는 것은 쉽지 않다. 내게 반란한다. 글이 나를 배척하면서 삽시에 내게서 돌아앉아 버린다.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한 사람의 원군도 없다. 적막한 전지에 에워싸여 어느새 나는 미아가 돼버렸다.

글은 언어를 부르는 것이다. 잠들어 있는 그 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불과 몇 초, 그렇게 임의롭게 부르던 언어들이, 그 말의 이름들이 행방불명이 되고 만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려면 엎치락뒤치락 한바탕 자신과의 싸움을 치러야 한다. 다행히 와중에도 무얼 쓰려 했다는 작품 의도가 머릿속에 가물거린다. 나이를 뿌리치면서 아직 쓸 만한가. 복원이 시작된다. 걸음걸음 거치적거리지만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

모두의 첫 낱말부터 다르다. 구절이 뒤틀리고 갈팡질팡 흔들리다 가까스로 자드락 가파른 비탈길을 넘어선다. 드디어 해냈다. 혹사(酷似)하진 않으나 유사한 모양새로 만들어 놓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이만하기 천만다행이다.

구름이 내준 틈으로 선뜻 한라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늘 여여할 뿐 한마디 말이 없다. 잃어버릴 글 반쪽을 찾느라 버둥대며 안절부절못해 한 둔재를 지켜보며 얼마나 웃었을까. 가가대소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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