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북정에 학교 개설…청년 개화·애국사상 고취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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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개화사상가 한석봉
 한백흥, 조천·신촌·신흥·함덕 등서 만세 항일운동 펼치다 체포
 한병택, 조천 출신…제주농업중학교 영어교사·미군 통역관 역임
 한보권, 어업·목장조합 창립…함덕초 설립에 토지 3400평 기증
 한봉삼, 日 오사카서 항일 활동…한국인 여공 해고에 파업 투쟁
 한석봉, 주민 교육에 헌신…김명식·고순흠 등 독립운동가 양성
한석봉은 1906년 조천리의 연북정을 교실로 이용해 ‘의흥학교’를 개설했다. 이 학교는 주로 한문과 산수, 실학을 가르치고 특히 일본어 교육에 주안점을 두면서 신진 청소년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사진은 연북정 전경.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석봉은 1906년 조천리의 연북정을 교실로 이용해 ‘의흥학교’를 개설했다. 이 학교는 주로 한문과 산수, 실학을 가르치고 특히 일본어 교육에 주안점을 두면서 신진 청소년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사진은 연북정 전경.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백흥韓伯興:1897(광무1)~1950(분단시대),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당시의 항일 활동, 본관은 청주.

한창원(韓昌元)의 장남으로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1일부터 4일간에 걸쳐 조천·신촌·신흥·함덕 등지에서 거세게 항일 운동이 전개돼 그도 체포당했다. 항소하자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에 3년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운동으로 1심에 기소된 자는 모두 29명이며 이 중 23명이 동년 4월 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형을 선고받았는데 9명은 항소하지 않았다.

▲한병택韓秉澤:생몰년 미상, 통역관, 조천면에서 태어나 송임생(宋壬生·제주-성안: 제주농업학교 서무과장)의 사위, 미군 통역관, 제주농업중학교(6년제) 영어교사.

1946년 3·1시위사건 후 공무원 파업에 의해 구속됐다. 1947년 3월 10일 오현(五賢)중에서 한 시위와 무허가 집회, 삐라 살포 등을 자행해 포고령 위반으로 6개월 체형(體刑)을 언도했다.

▲한보권韓保權:1898(광무2)~1938, 조천면장, 독지가, 본명은 한혜택(韓惠澤), 자 자운(子雲), 호 사정(沙汀), 본관 청주, 구좌읍 평대리(갓-머리)에서 한계흠(韓啓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6년 함덕리로 이주, 일찍이 함덕리에서 덕흥회(德興會)를 조직해 민풍을 진작하고 산업을 발전시켰다.

1980년 학교를 이설하게 되자 그의 3남인 한석화(韓晳和)가 부지 825평을 희사, 아버지의 유업을 이었다.

1926년 5월 조천면장으로 임명돼 10년 재임하면서 어업조합과 조천면 목장조합을 창립, 초대 조합장이 됐다.

함덕초등학교 설립을 서둘러 자기 소유 토지 3400평을 기증했다. 학부형들이 화산(華山) 한석화기념비를 교정에 세웠다.

1919년 구좌읍 송당리(손당)의 경민장이 되고 1925년 구좌면 풍헌(風憲)에 임명됐다. 초대 기성회장으로 추대돼 1937년 4월 개교를 보게 됐다.

함덕리민의 이름으로 사정거사(沙汀居士) 한보권기념회를 세웠다.

또 1974년 9월 함덕교 교정에 사정거사 한공보권 공적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한봉삼韓奉三:1908(융희2)~1974,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공산당원의 항일 활동, 본관은 청주, 한승훈(韓承勛)의 아들.

성산읍 고성리(동유암)에서 태어나 또 동년 5월 14일에 항의 시위를 하자 일경에 30여 명이 검거됐다. 이때 배후 인물로 체포당했다.

그는 1933년 6월 2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8월을 선고, 출옥 후 1933년 11월 권모(權某)의 소개로 일본공산당에 입당, 동(東)지구에서 활동하던 중 동년 12월 2일 체포, 동월 23일 기소돼 1935년 9월 7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됐다.

1974년 8월 12일 일본 와카야마현(和歌山縣) 전변시(田邊市)에서 사망했다.

1929년 5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1932년 4월 전협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동(東)지구에 가입, 1932년 오사카 니시요도가와구(西淀川區)에 위치한 소진무림(小津武林)기업이라는 방직공장에서 한국인 여공 36명을 무단 해고한 데 대해 동년 4월 22일 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한석봉 공덕비.

▲한석봉韓錫俸:1865(고종2)~1952, 개화사상가, 교육자, 호 남극(南極), 일명 한봉택(韓俸澤), 본관 청주.

조천읍 함덕리에서 한치건(韓致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말에 일본유람단의 일원으로 일찍이 개명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화사상을 실천했다.

1939년 8월 함덕리민의 이름으로 ‘주사 한공석봉공덕비’를 세웠고 1961년에 개건(改建)했으니 비문은 “聰明過人 先見世潮 沛然財力 島內率先 知慧卓越 志于新學 招師外人 立校育英 開拓犀山 始設漁網 豊人漁夫 偉哉芳名 擴張耕地 振興水産 咸頌其德 永世不朽”라고 썼다.

먼저 고향 함덕리의 신진 청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근대학교를 개설하려고 했으나 주민의 이해 부족으로 이를 단념, 마침내 1906년 조천리의 연북정을 교실로 이용해 의흥학교(義興學校)를 개설했다.

이 학교는 2년제로서 주로 한문과 산수, 실학을 가르치고 특히 일본어 교육에 주안점을 두면서 신진 청소년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마침 제주시 화북리 후풍관(候風館)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다케다(武田賢亮·일본인)를 초빙해 왔다.

한석봉은 학교 운영을 도맡아 투자하고 교사의 연봉과 운영비는 주민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이때 배출된 학생들이 후일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명식(金明植), 고순흠(高順欽), 김형식(金瀅植), 김문준(金文準), 홍두표(洪斗杓) 등이었다.

그는 고향 함덕리의 어장을 발전시키기 위해 일본인 어상 아라가와(荒川留重郞)를 설득, 근대어업에 대한 지식을 함덕리 주민에게 가르쳤다.

또 그의 영향을 받은 매부 김병주(金炳周·일명 김치순)는 처자식을 데리고 러시아로 망명해 안목을 넓히도록 하였다.

소련 니코리스크에 함덕리 출신 김원봉(金元鳳·1881)과 김만백(金萬伯·1867) 등이 살면서 항일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그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조천면장 한보권(韓保權·함덕)에게도 어업방법의 개량, 근대적인 농촌 건설, 봉건적인 폐습 타파 등에 주력하도록 하니 다른 읍면보다 발전이 앞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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