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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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익 수필가

자그마한 뽕나무 한 그루가 마당 옆 귀퉁이에서 오종종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연고라곤 하나 없는 낯설고 물선 곳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올해가 지나고 나면 부쩍 몸을 불려 뚫고 나온 벽돌을 들어 올릴 기세다. 줄기와 잎, 오디까지 모두 효험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 더 키워볼 요량으로 넓고 양지바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삽질을 두어 번 하자 그물 드리우듯 얼키설키 촘촘히 얽힌 뿌리들이 드러났다. 줄기에서 곧장 뻗어내린 가운데 뿌리는 땅속 깊이에서 뽑혀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장손 뿌리라 할지 싶다. 이게 굳건히 땅속에 박혀 비바람이 불어도 든든히 버틸 수 있었나 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꽃 좋고 열매 많으니.’ 불현듯 용비어천가의 한 소절이 머리를 스친다.

우리 민족만큼 조상을 떠받드는 민족이 지구상 또 있을까. 그 속에서 태어나 배우고 살아온 나라고 예외일 수 없다. 족보에 따르면 이 땅에 나의 시조는 약 천 육백여 년 전 중국에서 건너왔다. 몇 해 전 중국에 있는 뿌리를 찾아 답사를 떠난 적이 있다. 아주 까마득하게 3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시조 오태백 공의 묘소를 찾아 나선 것이다. 묘소는 중국 상하이와 가까운 우시(無錫)라는 도시 근교에 있었다. 중국의 국가급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일대 약 10여만 평이 공원광장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그 후손 한 사람이 선조 대대로 살아온 정든 땅과 혈육을 남겨두고 머나먼 동방으로 이주하게 된 데 어떤 연유가 있었던 것일까. 마당 옆에 홀로 덧난 뽕나무처럼 연고라곤 하나 없는 한반도로 흘러들어 홀로 살게 된 동기가 궁금해졌다.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뿌리란 무엇인가. 내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근원이 아니던가. 과거를 거슬러 현재의 나를 돌아본다.

새봄이 한창 익어가는 4월 초순, 엄동설한이 언제였나 싶게 봄의 기운에 우주가 깨어나고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조상의 묘소를 찾아 제를 지내는 묘제 날이 돌아왔다. 뿌리를 찾아온 친족들이 일 년 만에 조상의 묘역에서 다시 만났다.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파란 하늘과 쏟아지는 봄 햇살이 사위를 따스하게 녹여주고 있다. 들녘은 새싹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로 난리법석이다. 굳어 있던 나뭇가지, 사그라진 검불, 메마른 묘역의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른 여린 싹과 꽃들이 팝콘 터지듯 분출한다. 연초록빛 봉분 속에 잠들어 계신 조상님도 기지개를 켜며 나올 듯싶다.

좌청룡 우백호로 포근하게 둘러싸인 산소를 바라보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무덤가에 기대어 병아리 졸듯 한숨 자고 싶어졌다. 일장춘몽 중에 얼굴조차 모르는 옛 조상님이 나타나 샘물 같은 영감이라도 주실는지….

잠시 멍하니 명상 속에 빠져들었다.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 있으면서도 서로 바라볼 수 없을 뿐 한 몸이다. 무한히 발전하는 과학 문명이 언제쯤 죽음 너머 초현실 세계의 비밀까지 밝혀낼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생명이 다하고 나면 다시 한 줌 흙이 되어 우주로 돌아가는 게 만물의 숙명일 터인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운무 속에서 나의 존재는 온데간데없다. 사라지고 마는 게 목숨 붙은 생명의 운명일 터인데 그 세상은 절망적일까 희망적일까.

어서 묘제를 서두르라 재촉한다. 다섯 신위를 한 자리에 모시고 제를 올렸다. 초헌관이 되어 경건하게 향을 사르고, 술잔과 축문을 올려 조상님께 고했다.

“유세차(維歲次)!”

왁자지껄 앞다투며 피어나던 산천초목도 잠시 숨을 죽이고 머리를 조아리는 듯싶다. 축문을 읽는 소리가 향연(香煙)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간다. 티끌이라곤 하나 없는 짙푸른 하늘에서 조상님의 혼령이 금방이라도 강신하실 것만 같다.

조심스레 파낸 뽕나무를 넓은 곳으로 옮겨심다 보니 누에들의 뽕잎 먹는 소리가 소낙비 소리처럼 들리는 것 같다.

그동안 소원했던 뿌리에 대한 관념이 새롭게 나를 깨우친다. 방금 캐낸 뽕나무 뿌리처럼 이 땅의 후손들이 촘촘히 번성해 나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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