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기행
달빛 기행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현숙 수필가

구월 보름, ‘동검은오름’으로 달맞이를 간다. 종일 조바심치게 하던 강풍은 오후가 되어 잦아들고 소나기도 그치며 무지개가 생겼다.

임도에는 억새꽃이 무희의 손끝에 걸린 하얀 명주처럼 너울거리고, 뭉게구름은 그 위를 유유히 흘러간다. 조붓한 길엔 소나기로 제법 큰 웅덩이들이 생겼다. 누군가 놓은 작은 징검다리를 밟으며 조심스레 건너다 반사된 햇빛에 순간 아찔했다. 천 길 낭떠러지 같은 하늘이 발아래 있다. 흘러가는 구름도 조각난 푸른 하늘도 거기에 있다. 그 안에서 무겁고도 가볍고 검고도 흰 뭉게구름이 층층을 이룬다. 한참 정신을 파느라 홀로 뒤처졌다.

너른 들판을 지나는데 바람이 쏴 불어온다. 허리에 닿았던 수크령이 일시에 무릎께로 눕는다. 푸른 초목들도 눕는다. 그들을 따라 나도 풀썩 드러눕는다. 수크령이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놀을 받아 붉어진 구름이 서쪽으로 내달린다. 깊은숨은 몸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가 그보다 더 느리게 밖으로 빠져나간다. 얼마 만인가. 긴장하며 보냈던 타향살이의 체증이 사라지듯 무지근한 몸이 구름처럼 가벼워진다.

언덕배기에 물매화, 꽃향유, 잔대 등 가을꽃이 피었다. 그곳에 주소로 둘 수 있는 자격을 시험하듯 바람은 된통 흔들고, 그것들은 바람을 견디며 뿌리가 깊어진다. 바람을 이기며 섬에 산다는 것, 그 무엇이 저 초목과 다를까. 멀리 보이는 다랑쉬와 아끈다랑쉬, 일출봉과 우도에 아스라한 운무가 걸렸다. 거기엔 제주를 떠나기 전의 내가 있다. 오름과 올레길에 심취해 있던 사십 대, 나는 활기가 있었고 꿈도 컸다. 남산을 오름 삼고 한강을 바다라 여기며 오십 대를 넘기는 사이 참 많이 변했다. 아마도 훗날 여기에서 나는 또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

정상으로 가는 길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비옷이 펄럭이고 띠풀은 종아리에 감겨든다. 등을 돌려 비바람을 막으며 한 발 한 발 딛는 걸음이 몹시 더디다. 와중에 생경한 모습이 시선을 붙든다. 커다란 봉분이 아가리를 크게 벌린 채 검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죽은 자가 머물다 떠난 빈집이다. 육신도 소멸하여 자연이 되었을 그에게 후손은 무엇을 소망했을까. 영혼은 흔쾌히 따라나섰을까. 묘지가 처음 오름에 생겼을 때 그랬듯, 저 흔적도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점차 자연에 융화될 거다.

백약이 오름 뒤로 노을이 진다. 시나브로 일출봉 근처는 불야성을 이루고, 제2공항이 들어선다는 들판엔 암흑처럼 어둠이 짙어간다. 잠시 후 동편 하늘이 붉어지며 세상은 희끄무레 밝아온다. 흐린 달빛에 오름의 능선들이 아슴아슴 드러난다. 달도 둥글고 능선도 둥글고, 아름다운 풍경이 난개발로 사라진다며 열변을 토하던 누군가의 말도 둥그러진다. 바람에 스치던 풀들의 뒤척임, 풀벌레 소리도 잦아든다. 온 세상이 둥글달 하나로 고요하다. 여기까지 오면서 거쳐온 풍경들도, 그곳을 지나면서 들고나던 많은 생각도 결국 둥긂과 고요를 만나기 위한 것들이었나. 우리네 인간도 어쩌면 만월처럼 둥글어지려 애쓰다 종내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그 언저리에 머무는 건 아닐까.

달은 중천을 향하고 가슴 가득 둥근달을 품고 돌아오는 길, 헤드랜턴으로 생긴 앞 사람의 그림자가 여운처럼 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