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섬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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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공순 / 수필가

섬과 섬이 이어지고 포개지며 멀어져간다. 신안의 천사섬을 향해 가는 길, 새벽안개를 가르며 송공항에 이르니 우람한 천사대교가 오가는 배를 내려다보고 있다. ‘대기점도’로 가는 배에 오른다. 꽃을 뿌린 듯 흩어진 섬들은 저마다 하얀 포말에 둘러싸여 꽃잠에 빠져 있다.

섬이 1,004개여서 천사섬이란다. 섬사람들은 그 많은 섬 중 병풍도에 딸린 다섯 개를 묶어 ‘새끼 섬’이라 부른다.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이 그것으로, 이들을 이은 것이 십이사도 순례길이다. 두어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열두 개의 교회들은 십이 킬로미터의 답사길로 굽이굽이 이어진다.

새벽 배를 놓칠세라 동동거린 탓인지 선실 뜨끈한 온돌바닥이 등을 끌어당긴다. 바다의 숨결은 울렁출렁 등줄기를 쓸며 유혹하지만, 섬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에 이끌려 뱃전으로 나선다. 배는 서너 섬을 돌아 사람들을 내리고 태우며 대기점도에 닿는다.

하얀 벽에 코발트색 지붕을 한 ‘베드로의 집’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 작고 눈부신 교회가 순례길의 시작이었다. 열두 제자의 이름을 붙인 예배당은 저마다 부제를 달고 있었다. 건강의 집, 그리움의 집, 행복의 집, 사랑의 집……. 찰랑대는 바다를 배경으로 금색의 돔을 이어 화려하거나 산모퉁이에 조촐하게 선 목조 교회, 저마다 독특한 외양이 아름답고 소박하면서도 성스러웠다. 갯벌을 끼고 가다 빨간 지붕을 인 마을과 맨드라미꽃이 붉은 언덕을 지나 연노랑 초가을 논밭길을 걷고 걸었다.

섬이 마주 보고 선 갯벌 끝에는 노둣길이 이어졌다. 물때를 놓치면 건너지 못하는 노둣길은 썰물에 왕래하기 편하도록 돌을 쌓아 연결한 길이다. 섬과 섬의 사람이 오가고 인연이 오가고 많은 이야기가 노둣길로 이어졌으리라. 썰물에는 길이 열리고 물이 들면 넘실넘실 바닷물에 잠기는 노둣길, 지금은 자동차도 달릴 수 있도록 넉넉하고 평탄하게 보수해 놓았고 딴섬으로 가는 길만이 자연 그대로의 모래밭이다.

딴섬에는 ‘가롯 유다 교회’가 있다. 뾰족지붕에 붉은 벽돌로 쌓은 이 교회는 밀물이 차오르면 출렁대는 바다에 둘러싸여 오도카니 홀로 서 있다. 은화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신자였기에 이렇듯 작은 섬에 가둬놓은 걸까? 나선형으로 꼬인 종탑 기둥이 눈길을 잡는다. 고통스러운 유다의 마음인가, 보는 이의 느낌을 뒤틀어 표현한 것일까. 베드로의 집에서 첫 종을 치며 시작을 열었듯, 이곳에서는 열두 번의 종소리로 순례를 마무리한다. 바다로 퍼져나가는 종소리가 솔바람에 가뭇없다.

“쏴아 쏴아~” 저만치서 바닷물이 밀려오는 소리에 숨이 차도록 달음박질을 쳤다. “뭐시 그리 바쁘다요? 요참에 못 나오먼 바다가 열어줄 때 나오먼 되제.” 언제부터 대나무 숲길 끝에 서 있었는지 반달처럼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웃고 계셨다. 겨울 억새처럼 거칠고 허연 머리카락이 해풍에 흩날렸다. 들고 나는 물때에 맞춤해 사는 느긋함이랄까. 바닷길의 닫힘은 열림의 전주임을 믿는 그 소곳함에 마음이 안온해진다. 바람결에 사그락대는 대나무 숲길을 되짚어 걸었다.

천사섬 순례길, 그림 같은 풍경에 이끌려 왔으나 어쩌면 쉼표가 필요했는지 모를 일이다. 뒤돌아보니 질퍽한 노둣길을 지나 가풀막을 훠이훠이 오르기도 했고, 유채꽃과 보리밭이 펼쳐진 싱그러운 오솔길을 지나기도 했다. 고락으로 바느질한 조각보 같은 지난날이 이제는 다슬기처럼 뭉그적거려도, 우보牛步를 흉내 내도 좋으리라며 내 등을 가만히 도닥인다.

선미를 가르는 물보라와 꽃잎처럼 피어있는 섬, 섬, 섬에 붉은 노을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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