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포화 속에서 정치·외교·경제·문화를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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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下

옛 경남도청에 임시 중앙청·상무관은 국회…美대사관 등 각국 외교기관 옮겨
부산항으로 들어온 구호 물자 국제시장서 유통…오늘날 대기업들 뿌리 일궈
화가 이중섭·김환기, 작가 김동리·황순원 등 문인·음악가 등 문화예술 꽃피워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은 명실상부한 정치, 외교,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인들은 광복동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도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

한국전쟁 부산 피란수도 시기 대통령 관저로 사용된 옛 경남도지사 관사. 현재 임시수도기념관이다. 부산일보=이재찬 기자
한국전쟁 부산 피란수도 시기 대통령 관저로 사용된 옛 경남도지사 관사. 현재 임시수도기념관이다. 부산일보=이재찬 기자

 

▲격동기 정치 중심에…

한국전쟁기 부산이 처음 임시수도가 된 시기는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6일까지다. 서울 수복 후엔 부산에 있던 정부 기관도 환도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1년 1월 3일 정부는 모든 정부 기관을 부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다.

부산 서구 부민동에 있는 경남도청사(현재 동아대 석당박물관)가 임시 중앙청이 된다. 경남도지사 관사(현재 임시수도기념관)는 대통령 관저로 활용된다. 국회는 중구 부산극장에 있다가 이후 경남도청 체육관인 상무관을 사용한다. 1940년대에 지어진 남포동 소화장아파트는 국회의원 관사가 됐다.

미국대사관은 부산 미문화원에 자리를 잡는 등 각국 외교 기관도 부산으로 옮겨온다. 체신부는 부산우체국을 사용하고, 부산시청사는 사회부와 문교부 등이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대체로 중구에 자리를 잡은 다른 정부 부처와 달리 교통부는 부산진구 범천동에 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부산시민들이 범곡교차로 일대를 ‘교통부’라 부르는 이유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장기 집권을 위한 첫 번째 개헌이 이뤄진 곳도 부산이었다. 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1952년 5월 26일 0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발동한다. 바로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다. 이날 오전 동래구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중구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워 모두 47명을 싣고 임시 의사당이 있는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서려다 총 든 헌병의 검문을 받는다. 이에 맞서 1시간을 버티던 국회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의해 사람이 탄 채로 헌병대로 끌려갔다. 몇몇은 국제공산당 음모 사건 피의자로 구속 당했고, 야당 의원 30명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아 여름 내내 숨어 지내야 했다.

이로부터 39일 만인 7월 4일 야당 의원이 제의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 제안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교묘히 절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온갖 위협과 탄압 속에 통과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고, 1960년 4·19로 하야할 때까지 12년 장기 집권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이에 앞서 부정부패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중석불(弗) 사건도 있었다. 중석불이란 중석(텅스텐)을 수출해서 번 달러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의 거의 유일한 수출 품목인 중석을 수출해서 벌어 들인 달러로는 원래 양곡과 비료를 수입할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긴급을 요한다는 구실로, 15개 상사에 총 25건 483만 5300달러에 달하는 중석불을 불하한다. 업자들은 이 돈으로 소맥분 같은 양곡, 비료를 도입해 무려 500억 원의 폭리를 봤다. 이 돈이 격동기 정치자금으로 쓰이면서 건국 후 첫 정경유착 사건으로 남게 된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운영된 스웨덴적십자 야전병원 의료진이 촬영한 부산항 일대. 주한스웨덴대사관 제공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운영된 스웨덴적십자 야전병원 의료진이 촬영한 부산항 일대. 주한스웨덴대사관 제공

▲부산항과 국제시장

부산항은 전 세계의 원조 물자가 들어오는 창구였다. 동아대 사학과 전성현 교수는 “한국전쟁 시기 구호물자의 3분의 2 이상이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왔다”며 “부산항을 중심으로 물자가 유통되면서 이때부터 서비스업 중심의 부산 경제 구조가 형성됐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전국이 전쟁터가 되면서 생필품 공장조차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다. 부산항을 통해 들어와 국제시장에서 유통되는 각종 물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유엔 원조물자나 미군용품이 부정 유출된 경우도 많았다. 남의 물건을 조금씩 슬쩍슬쩍 훔쳐 내는 짓을 속되게 이르는 ‘얌생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2021년 부산시가 펴낸 구술 채록·자료집 <피란, 그때 그 사람들>에도 ‘얌생이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운송물자 중에 값이 나갈 만한 것을 무조건 트럭 밖으로 집어 던지는 거야. 던지면 운반책이 주웠어. 그때 서면 일대가 판잣집으로 되어 있는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가면 나오지를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미군이 추격해도 찾지를 못해. 그래서 그걸 ‘얌생이 몬다’라고 했어.”(1934년생 박형숙 씨 구술)

대기업들은 부산에서 그룹의 뿌리가 된 기업을 일궜다. 삼성그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제일제당은 현재 부산진구 부전동에 터를 잡았다. LG그룹(옛 럭키그룹)의 모체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도 이 시기 설립된다.

부산일보사가 발간한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LG그룹의 창업주인 구인회·정회 형제는 서구 서대신동 판잣집 비슷한 가내 공장에서 소위 ‘동동구리무’라고 불리던 여성용 크림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화장품 용기가 없어 고물상에서 외제 통을 수집해 썼는데, 뚜껑이 없어 말썽이었다. 고심 끝에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플라스틱 뚜껑을 만들기로 하고, 원료와 전열기·금형기계를 들여온다. 플라스틱 뚜껑 제조는 대성공을 거둬 300만 원으로 시작한 자산이 3억 원으로 늘어났다.

자신감을 얻은 구 씨 형제는 부산진구 부전동에 약 165㎡(50평) 규모 공장을 새로 짓고, 미국에서 플라스틱 제조 기계를 도입했다. 처음 생산한 상품은 ‘오리엔탈’이라는 상표의 빗이었다. 이 빗이 우리나라 최초의 플라스틱 제품이다.

1952년 부산 중구 백산기념관 앞 ‘뷔엔나다방’.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1952년 부산 중구 백산기념관 앞 ‘뷔엔나다방’.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문화공간이 된 다방

전쟁기 부산에서 문화도 꽃을 피운다. 화가 이중섭과 김환기, 작가 김동리, 황순원을 비롯한 문인과 음악가, 영화인도 피란을 왔다. 갈 곳 잃은 예술가들을 품은 것은 다방이었다. 다방은 전화 연락이 가능한 곳으로, 타지와의 교신을 위해 주소를 제공하거나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역할까지 했다.

더마루아트 박진희 대표(미술평론가)는 “폭격에서 안전한 부산으로 예술가가 몰리면서 다방도 우후죽순 생겨났다”며 “중구 광복동의 다방은 미술가에게는 전시장으로, 문인에게는 작품 발표 장소 등으로 문화센터이자 살롱의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다방으로는 △밀다원 △금강 △뉴서울 △루네쌍스 △금강 △휘가로 △늘봄 △파도 △망향 △비원 △스타 다방 등이 있었다. 특히 광복동 일대는 국제시장이 인접해 있어 소비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생계를 위해 작품을 팔아야 했던 화가들에게는 전시를 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됐다.

피란 생활 중 이중섭이 오랜 시간 머무르며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곳도 다방이다. 그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은지화'의 요람은 금강다방으로 알려져 있다.

밀다원다방은 김동리의 단편소설 ‘밀다원 시대’에도 등장한다. 경남 통영 출신의 화가 전혁림이 피란 중 1952년 첫 개인전을 열었던 곳도 밀다원다방이었다. 전혁림미술관 전영근 관장은 “당시 시인 유치환이 써준 전시회 초대 글(발문)이 현재 통영 전혁림미술관에 남아 있다”고 밝혔다. 
부산일보=이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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