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두 벌, 신발 한 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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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있는 걸까?’는 시험의 대상이 아닌 자신과의 약속이다.

늦어 버린 반성은 기억에 남아 있는 괴로움이고 마음으로부터 용서받고 싶으나 엎질러진 물 주어 담을 수 없기에 갚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게 아니다 구차한 변명을 해 보지만 슬픔과 절망은 언제나 그 자리. 미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매섭게 쳐다보니 혹시 하는 불안은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억지로 웃어보지만 잠시 잠깐 위안다.

머리카락 보일까 숨고 싶은 심정이지만 부질없음을 탓해야 한다. 지나고 없는 과거 어쩔 거냐 따지고 싶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 공허함만 더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최고여야 하고 거짓과는 가까운 친구 변치말자 손가락을 걸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단어는 원래부터 없었으니 귀찮은 존재이고 두 번 하면 잔소리다. 커다란 깨우침이 아니어도 가슴에 울림을 들었다면 행동하는 양심 실천으로 옮겨 가자.

누군가가 고개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면 악이 선으로 변해지는 과정이고 몰래 하는 선행은 하늘 복에 주인임을 알아내자. 가난한 베풂은 부모님에게는 안녕과 평화를 선물하고 가족 울타리에 꽃을 피운다는 게 정해진 순서이다.

영걸씨는 죽은 후에도 오갈 데가 없다. 나이 오십에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채 운명의 짝을 그리워했으나 현실은 팍팍했고 나이 듦에 자신감도 떨어졌다. 솜씨 좋은 목수고 낭비 없는 살림에 부자 소리 들었으나 실체는 껍데기. 형제들 뒤치다꺼리에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알고도 속아주고 오죽할까 싶어 주머니를 털어 줬으나 그때뿐.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 뻔뻔함이다.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겨 지인이 수소문을 해 보니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고 소리소문 없이 장례식을 치렀다. 남아있는 식구들 입장에서는 총각이고 조문 올 손님도 없을 거라는 핑계였지만 득과 실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쁘다.

평소에 얼굴 알고 지내던 분이 불쌍한 영혼 가는 길에 외롭고 쓸쓸할까 명복을 빌어 달란다. 흔하지 않은 경우라 사연을 물었으나 그래야 편하겠단다.

착함의 정도가 심하다.

망자는 나오자마자 신세한탄이요 억울해서 못 가겠단다. 전생에도 남에게 업신당하기 일쑤에 서러움의 연속이었단다. 나름 계획이 있어 당분간 이곳에 머무를 것이니 도움을 주면 거기에 대한 충분한 보답을 하겠단다. 깨끗한 옷 두벌, 신발 한 켤레에 간단한 의식을 치러 주면 고맙겠다는 당부는 창문 밖 다른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증거이자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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