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혁우동맹 활동…해녀 수탈 적극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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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항일 활동 한향택
한정운, 제주목사…공진정 중건·동성문 연상루 중수
한진섭, 오사카 민중시보 언론 활동…동화정책 폭로
한천, 조선 건국 당시 제주에 유배…서당·사장 열어
한향택, 항일운동으로 옥고…농민 항일정신 의식화
한향택은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 활동을 펼쳤다. 사진은 구좌읍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한향택은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 활동을 펼쳤다. 사진은 구좌읍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한정운(韓鼎運):1741(영조17)~?, 문신. 제주목사. 경기도 통진(通津·서울에 편입)에서 출생, 자는 사규(士揆), 본관은 청주, 1768년(영조44) 문과 식년전시에서 병과로 급제, 1807년(순조7) 3월, 박종주朴宗柱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09년 1월에 떠났다. 벼슬은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한정운의 마애명.
한정운의 마애명.

1807년 공진정(拱辰亭)을 중건하고 1808년 봄 주성 동성문에 있는 연상루(延祥樓·일명 제중루·濟衆樓)를 중수했다. 또 군기고와 남북수구의 홍문(虹門)을 개축하고 동문과 사라봉에 식수해 과수원을 망경루(望京樓) 북쪽에 설치했다. 그의 필체 마애명이 현재 방선문(訪仙門)에 남아 있다. 또 한시 마애명이 산방산 암벽에 남아 있다. 오점(吳霑)의 ‘연상루중수(延祥樓重修) 상량문(上樑文)’과 김양수(金亮洙)의 ‘연상루 중수상량문’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한진섭(韓辰燮):1910(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 민중시보(民衆時報)의 언론활동과 공산당의 항일활동. 본관은 청주, 한흥주(韓興周)의 아들, 구좌읍 김녕리에서 태어났다. 

오사카에서 일제의 부당성을 폭로하며 강력한 항일 필봉을 휘둘렀다. 일경은 1936년 9월 25일 그를 검거하고 민중시보는 동년 11월 1일로 폐간시켰다. 이 일로 편집 책임 이신형(27)과 공무 책임 한진섭(26) 등은 체포돼 1936년 12월 18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양인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하자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에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혁명의식을 고취하다가 동년 11월에 검거됐다. 

1935년 6월 항일 운동의 거목 김문준(金文準·조천)에 의해 창간된 민중시보는 1936년 5월 26일 김문준이 순국하자 사위 이신형(李信珩·조천)이 인수해 기선회사 대리업을 하던 한진섭과 함께 경영했다. 

점차 항일 논조를 강화하면서 제주교포의 도항문제, 차가(借家)문제, 즉 한국인이 일본으로 건너가려면 경찰의 허가증을 받아야 되고 또 일본에서 집을 빌어 살려고 해도 한국인을 멸시 천대해 집을 빌려주려 하지 않는 문제 등에 대해 민중시보가 대변해 주는 언론의 구실을 했다. 

더구나 반민족 친일단체인 내선교풍회(內鮮矯風會)의 동화정책을 폭로하면서 소비조합 운동과 노동자의 복지 보호운동 등에 대해 정론을 폈다.

한천유허지 비석(표선면 가시리).
한천유허지 비석(표선면 가시리).

▲한천(韓蕆):생몰년 미상, 문신. 유배인. 본관은 청주, 우정승 악(渥)의 손자로 도첨의사(都僉議事) 대순(大淳)의 아들, 1365년(공민왕14)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부(古賦)로 민안인(閔安仁) 등 55인과 십운시(十韻詩)로 임한(林翰) 등 41인을 뽑았으며 1371년 경상도도순문사가 됐다. 그가 훈학했다고 하는 곳에 구한말에 제주에 온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천유허비명(韓蕆遺墟碑銘)’을 지어 오늘에 전한다. 

1391년(공양왕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거쳐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으로 찬성사,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유배, 뒤에 풀려 나와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2) 태조로부터 전조대신(前朝大臣) 71인을 포상하라는 명에 의거, 개국원종공신이 되어 원종공신은 전 15결과 노비 2명을 받았다. 1400년(정종2) 권희(權禧) 등과 함께 판삼사사로 치사하였다. 1392년(공양왕4) 예문관(藝文館) 대제학이 되었으나 이 해에 역성혁명으로 이조가 일어나자 고려의 척신 단양군(丹陽君) 우성범(禹成範)의 일파로 지목돼 이성계에 의해 우성범이 살해될 때, 한천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지라고 전하는 정의(旌義·표선면 가시리)에는 서당과 사장(射場)을 열었다.

▲한향택(韓香澤):1906(광무10)~1973,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활동. 본관은 청주, 한평도(韓平度)의 장남, 구좌읍 종달리에서 태어났다. 혁우동맹원들은 당시 제주도해녀 어업조합의 수탈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한향택은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3년 구형에 징역 3년 언도를 내리자 불복 상소, 동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3월 이 일이 탄로돼 배후 인물로 지목된 종달리의 야체이카 회원 8명이 피검됐다. 즉 1930년 9월 20일에는 구좌읍 세화리 김시화의 방에서 신재홍·오문규·김순종·김시곤·한향택 등이 집결해 협의했다. 그리고 신재홍(구좌)·김한정(대정)·홍관아(일명 순일淳日·제주읍)·김민화(조천)·한향택(구좌)·장종식(제주읍)·김석송 등이 용담리의 하천에서 모여 ‘제주도 사회운동자간담회’를 개최, 제주도의 동부는 신재홍, 서부는 장종식이 분담. 소년 소녀에 편중된 운동 노선을 수정하여 운동방법으로 전환했다. 

또 신재홍이 구좌의 책임자로서 1931년 11월 종달리 한향택을 제주도 야체이카의 당외분자로 가입시키고 또 한향택·신재홍의 주도 아래 채재오·한원택·고사만 등과 같이 종달리 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협의, 농민의 항일정신을 의식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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