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발길 닿는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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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 수필가

저녁 어스름 바다는 안개에 젖어있다. 어둠 속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산산이 흩뿌리는 안개비 속으로 나선다. 이 시간이면 산책하는 이들로 북적대던 이 길이 날씨 탓인지 한적한데 캠핑카 불빛만이 수면 위를 하얗게 비춘다.

수평선은 늘 저만치에서 한 줄로 경계를 긋는다. 황토색으로 출렁이는 변시지의 작품 속 그 바다도 언제나 한 줄 수평선이 경계를 긋고 조각배 하나가 흔들리며 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수평선을 넘을 듯한데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넘어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 경계에 서서 바라보면 섬과 바다와 조각배는 벗어날 수 없는 실체처럼 다가온다.

살다 보면 그 무언가가 간절해지는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바다를 찾아오고 음악에 마음을 여는 건지 모른다. 이어폰을 꽂고 오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가을날 스산한 바람이 허공을 긁듯 슬픈 곡조가 나를 따라온 바다와 한 몸이 되어 내 깊은 곳을 울린다.

‘자클린 뒤 프레’가 연주하는 엘가의 첼로협주곡. 연인처럼 첼로를 품에 껴안고 위무하듯 애무하듯 눈을 감고 활을 당긴다. 그녀가 당기는 활에 온몸을 맡기고 육신의 뼈 마디마디까지 울리는 첼로의 선율이 온몸을 휘돈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삭막하게 때론 울부짖음으로 구석구석 스며들어 존재를 일깨운다.

연주자로서 한창일 때 ‘다발성 경화증’이란 불치의 병으로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던 여인. 이 여인은 자신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했음인가. 슬픔은 슬픔으로 아름답다고 어루만지는 듯하다. 그녀의 연주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듣고 있으면, 불행하다는 이미지는 사라지고 비장한 아름다움만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고요히 잠재운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아 바흐를 불러내는 아침. 이 순간만큼은 백지 한 장을 펼치고 첫 문장을 기다리는 순수한 떨림이고 싶다.

어제와 다름없는 일터로 나가려는 준비는 핸드폰을 열어 단톡방 확인으로 시작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사진이며 글들이 올라온 카톡방은 늘 번잡스럽다. 하지만, 동료 해설사들이 근무지에 출근했다는 인증사진은 ‘밤새 안녕’이란 말을 대신하는 인사처럼 반갑다.

y가 활짝 웃는 자기 얼굴을 찍고 “행복한 오늘”이라고 올렸다. 이어서 동생과 같은 k가 “내일 말고 오늘 하세요, 뭐든. 먹고픈 거, 하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그 뒤로 “공감합니다. 오늘”이라는 답글이 올라온다.

k의 인사가 오늘따라 살갑다. 얼마 전 사월 초파일에도 건강하게 다니셨던 그녀의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치료 중이다. 살면서 우리 누구나 겪을 수도 있는 험한 일을 치르는 그녀의 인사가 진심이란 걸 알기에 마음이 쓰인다. “우리 어머니 강한 분이라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어날 겁니다.” 그녀의 말이 짠하게 가슴 복판에 박힌다.

우리의 삶이란 다 이런 것인가. 갑자기 닥친 비운, 지나간 내 삶에도 깊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대화를 나누다가 목전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은 남편을 보며 내 의식 속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져 버린 그때. 위로해주던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나에겐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오늘 아침 눈을 떴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어제처럼 오늘을 보내지만, 그 오늘은 어제를 살다 간 이들이 간곡히 바라던 내일이었음을 알기에 겸허히 맞이한다.

무언가 간절한 날 내 발길은 바다로 향한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바다의 품은 무한하다. 그 품에 안겨 눈을 감으면 가슴에 흐르는 위로의 선율. 나는 바다를 보고, 바다는 나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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