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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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미 문화부장

최근 주말 저녁 시간대 방송 프로그램에서 ‘진화된 인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을 주제로 출연자들이 차례대로 줄서기를 한 적이 있다. 

신체, 지능, 외모로 갑론을박이 오가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스스로 자신은 못생겼다며 7위를 자처하면서 1위에서 7위까지 순위가 정해졌다.

그러나 미세먼지나 황사에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이 작은 사람이 생존에 유리할 것이라는 이유로 1위가 결정된 것을 보면, 제작진의 의도는 외모가 아니었다. 

위험하거나 특별한 상황에서 생존에 유리한 특징을 가진 사람에 대한 발견, 즉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보가 ‘더욱 발전해간다’는 방향성의 의미를 가진다면,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다. 생존만 있을 뿐이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발표한 ‘진화’는 ‘변이’와 ‘자연선택’, 이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된다. 

‘변이’는 개체 사이에서 나타나는 습성, 형태 등의 형질 차이를 말한다. 

‘자연선택’은 이런 변이에 따라 개체마다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다른데, 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변이를 가진 개체는 그렇지 않은 개체에 비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는 개념이다. 개체가 환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환경이 선택한 개체만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그렇게 따지면 사실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인류에게 더 진화했다느니, 덜 진화했다느니는 의미가 없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기만 하더라도 진화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류가 계속 진화의 물결 위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최근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으로 교육현장이 뜨겁다. 

학교는 ‘진화’에서 말하는 생존경쟁을 하는 곳이 아니다. 약육강식의 세계도 아니다. 인류가 지성을 동원해 만들어놓은 체계화된 조직으로, 함께 진보하기 위해 힘을 모아 운영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부조리를 증명해야 하는 곳이라면 야생의 생물들이 살아가는 냉혹한 자연선택의 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 

그동안 아이들은 학교폭력과 입시에 대한 중압감 등을 죽음으로 수없이 증명해왔다. 또 학교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상황은 교사가 죽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결과적으로 가정이, 사회가 멍들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교사, 학부모의 권리와 책임이 가시화됐다.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진 교육시스템이지만, 결국 더 진보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 사건이 증명하고 있다. 

평생 초등교사로 근무하다 10여 년 전 명예퇴직을 선택한 나의 어머니는 최근의 사태를 보며 당시 자신 역시 그런 경험 때문에 학교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을 했다. 
수십 년 베테랑 교사가 감당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교육부의 대책과 각 지역교육청의 대응, 학교 현장에서의 매뉴얼 강화 등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우선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모두 학생이, 부모가, 교사가 될 수 있기에 나 역시 부모로서 자성해본다. 과연 교육의 3주체 가운데 하나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말이다. 소망이 있다면 인류는 여전히 진화하고, 우리 사회는 더욱 진보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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