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科學)과 인문학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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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전에 없이 힘든 여름을 보냈다. 폭우에 이은 폭염 탓에 인명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코로나 블루’로 힘들었던 터라 ‘살아남은 우리’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과학기술문명’ 시대라는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요즘 말로 ‘멀티버스의 재앙’에 갇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과학기술문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새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 덕분인지 ‘과학(科學)’이라는 말은 팬데믹과 극한 기후는 물론 정치 현안에 이르기까지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영어 ‘사이언스(science)’는 ‘알고 있는 상태’나 ‘사실’을 가리키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 이 용어가 등장한 18세기 초반 무렵은 ‘관찰이나 실험과 같은 증명 가능한 사실을 토대로 한 자연 세계에 대한 실증적 지식’이 요구되던 때였다. 하지만 뉴튼(Isaac Newton)도 이 새로운 학문을 ‘자연철학(philosphiae naturalis)’이라고 부를 정도로 대중화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더욱더 전문화 세분화되면서 발달하자, 19세기부터는 ‘사이언스’라고 하면 자연과학부터 떠올리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이라는 말이 낯설 정도다.

한자어 ‘과학’은 분과학문(分科學問)을 줄인 말이다. 메이지 유신 전후에 네덜란드에서 유학했던 니시 아마네(西周)가 처음 사용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동아시아 학문과 서양 학문의 차이를 이론에 기반한 학(學, science)과 실용에 기반한 술(術, arts)을 구분한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서양 학문이 학과 술, 두 가지가 혼합되어있어서 확실히 구분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후 도쿄대학을 중심으로 서양 학문 분과에 따른 교과목이 설치되고 편제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분과학문 체제가 구축되고 대중화되었다.

오늘날 정책당국과 교육 및 연구기관은 교육환경 변화, 또는 사회적 요구 등을 이유로 ‘학제간 융복합’에 몰두하고 있다. 제4차산업혁명과 기후 위기 등으로 빚어진 언노멀(unnormal) 시대에 ‘인간 생명의 지속가능성’을 바라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자는 말은 퍽 달콤한 제안이다. 학문 분과의 칸막이를 없애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의 문제점을 해결해낼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 이르면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러한 기대와 기획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의 지속가능성’이 오히려 위협받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다는 데 있다. ‘근래 반백 년 동안 이 나라의 과학 기술 분야는 괄목할 만큼 발달’해왔지만, 삶의 질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어서 그렇다. 역설적이지만 ‘과학으로서 인문학’, 곧 인문과학의 가치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인문학은 ‘반성과 비판을 항상 거쳐야 그 지식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가치’를 대상으로 삼는다. 반성 없는 통합은 ‘골조 없는 건축물’이요, 비판 없는 실용은 ‘폭주하는 기관차’이기 때문이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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