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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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양 수필가

추석이 코 앞이다.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향한다. 저만치 할머니 유택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먼저 달려 나간다. 마당에는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산소 옆에 심어놓은 측백나무도 내 키를 훌쩍 넘긴다. 긴 장마 탓인지 올해는 유난히도 잡초가 무성하다. 시원한 바람결에 우듬지 사이로 가을 햇살이 반짝이며 쏟아져 내린다. 하얀 들국화가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흔들리는 꽃송이가 할머니 손짓인 양 반갑기만 하다.

“할머이, 집 단장 좀 하겠습니다.”

풀벌레와 산새들 노래가 은은히 울려 퍼지던 산속에 예초기가 돌아가자 숲이 화들짝 놀란다. 메케한 연기를 내뿜으며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에 풀벌레는 노래를 멈추고 산새들도 서둘러 날아오른다. 잘려 나간 풀잎이 산지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벌레들은 정신없이 달아난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땀을 식히는 사이 아들이 예초기를 잡는다. 일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아직은 손에 선지 영 진척이 없다. 풀을 베어낸 자국도 높낮이가 들쭉날쭉한 게 아직은 기계 다루는 솜씨가 어설프다.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쩔쩔매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추석 무렵이면 산과 들에는 벌초가 한창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삼십여 리 산길을 걸어 다니며 벌초를 했다. 누나와 동생도 있었지만, 산소에 갈 때면 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꼭 데리고 다녔다. 오솔길로 들어서면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이 또르르 굴러 내 바짓가랑이를 촉촉하게 적셨다. 산길을 걷다 보면 고소한 개암도 따고 잘 익은 알밤을 줍기도 했다. 넝쿨을 타고 주렁주렁 매달린 머루와 다래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까맣게 익은 머루의 새콤한 맛과 말랑하게 익어가는 다래의 꿀맛은 벌초하러 다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다.

산소에 도착하면 벌초가 시작되었다. 나도 일손을 거들었지만 풀 베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고사리 같은 손에 낫은 버거웠고, 어설픈 낫질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 자리를 맴돌 뿐 진척이 없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꼼지락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손 조심하라며 빙그레 웃었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땀을 식힐 때면 아버지는 은근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 죽고 나면 누가 벌초하러 올는지 모르겠다.”

혼잣말처럼 ‘아무래도 벌초는 내 대에서 끝내야 할 것 같다’ 라며 걱정거리를 한 보따리 풀어 놓고는 슬며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애꿎은 풀잎만 손으로 뜯었다. 그때마다 집에 있는 동생이 부러웠다. 아버지는 미덥지 않은 장손의 속내를 은근히 떠 보았지만, 속 시원한 대답 한마디 듣지도 못한 채 걱정만 하다 끝났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조상님 산소 앞에서 잔소리 같은 하소연을 듣노라면 나도 몰래 짜증이 났다. 바쁘게 살다 보니 조상님 산소를 찾는 발걸음도 점점 뜸해지고, 산등성이를 넘어 벌초하러 다니던 오솔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경쾌하다. 그새 기계가 손에 익었는지 아들은 제법 능수능란하게 풀을 깎는다. 예초기가 지나간 자리는 덥수룩하던 머리털을 이발한 듯 시원해 보인다. 어느새 할머니 산소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 말끔하다. 벌초 때마다 잔소리처럼 들리던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할머니 집 단장을 마치고 절을 올리니, 하얀 들국화가 바람에 일렁이며 환하게 미소 짓는다. 듬직한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혼잣말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벌초하러 올는지’라며 넌지시 녀석의 눈치를 살피니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슬땀만 흘리고 있다.

흰 구름 떠도는 가을 하늘에 붉은 고추잠자리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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