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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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내겐, 시골 어르신들이 늙은 팽나무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히는 풍경이 익숙하다. 불볕더위엔 베적삼으로 스며드는 바람으론 턱없어 한 손에 부채를 쥐어 흔들었다. 자연 바람에 인공 바람의 합작이었다. 우리네 여름의 시골 풍경으로 운치 있어 보이긴 하나, 땡볕에 올라오는 복사열로 부채를 흔들어도 실은 별무소용이었다. 덥다, 덥다 하며 부채를 몹시 흔들어대면 땀이 더 흐른다. 그나마 어찌어찌 낮잠을 청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은 일진이다.

문명이 산들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를 만들어 냈다. 흐르는 땀을 들여주니 실용적으로 놀라운 발명이었다. 뜻 그대로 갑자기 시원하고 서늘한 바람을 불어오게 했으니, 선풍기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순탄치도 못해, 태어나자마자 전기를 먹는다며 규제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선풍기도 오래 틀고 자면 죽는다.’는 그 시절의 유명한 괴담이 생겨났지 않은가. 새벽에 기온이 뚝 떨어지니 선풍기를 꺼서 전기를 아끼자는 의미가 숨어든 것이었다. 웃지 못할 그 시대의 뉘앙스가 풍겨난다.

에어컨과 동시에 틀면 방의 온도를 쾌적하게 유지해 주고, 낮은 온도의 공기를 지속적으로 부채질해 주기 때문에 좋다. 중간중간에 에어컨을 꺼도 실내 온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선풍기만 가동시켜도 시원하다. 그래서 덩달아 절전 효과도 있다. 여름 한철 더위를 물리는 데 두 기계의 궁합이야말로 최강이 아닌가.

큰 것, 작은 것, 벽걸이, 실내의 구조에 맞게 천장에 붙여놓는 대형의 것 등 크기며 모양이며 디자인들이 다양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풍기는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휴대용까지 등장한 지 오래다. 길에서, 버스에서, 얼굴 앞으로 시원한 바람을 부쳐 보내주는 녀석이 장난감처럼 참 앙증맞다. 좋으니까 돈 주고 사는 것이다. 이동 중에 휴대하는 건 지나쳐 보이긴 하지만, 더위를 쫓기 위해서 제 몫을 하는 게 분명하니 뭐라 할 것인가.

에어컨이 나오면서 위상이 한풀 떨어져 오랫동안 독보적이던 위치가 크게 흔들린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아직 근본은 튼튼하다. 에어컨에 비해 전기가 훨씬 적게 들기에 경제적이라 변함없이 이용한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전기 요금이 아까워 제대로 틀지 못하는 가난한 가정들도 적지 않은 세상이다. 에어컨 1대가 선풍기 30대와 맞먹는 전기를 소모한다는 통계가 있다. 깜짝 놀랐는데, 오히려 그 이상이라는 말에는 아연실색했다. 한 달 내내 틀어도 3000원이 채 안 나온다는 얘기다. 그만큼 가성비가 높다. 폭염이 이어지는 여름에 선풍기 만한 효자가 어디 있으랴 싶다.

내 방에도 에어컨이 책상 앞 벽에 붙어 있으나, 많이 켜지 않고 선풍기에 기대고 있다. 안 켠다고 가족들로부터 늘 질책을 받는다. 실제, 참는 게 무리인 날도 없지 않지만 견딜만하면 견디자 하고 있다.

밤에는 눈치 볼 것 없이 선풍기 신세를 진다. 밤새 옆에 아주 끼고 잔다. 엉뚱한 공상까지 한다. 녀석이 애초 죽부인같이 껴안게 만들어졌다면 참 좋았을 걸….

선풍기 덕분에 불타는 올여름 큰 탈 없이 잘 건넜다. 선풍기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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