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갔져(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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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현상한 사진처럼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어른이 있다. 처조모님. 장인 장모의 자리를 대신해 온 그 연(緣) 때문일까. 들었던 얘긴데도 또 귀를 세우게 되는 사연으로 첩첩하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생인 어른은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의 거센 물결에 일엽편주로 휩쓸렸다. 어른이 겪은 슬픔, 아픔, 고통 어느 하나 당신이 태어난 해의 3·1운동 그 역사적 사건의 격렬함과 같은 맥락 아닌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그렇게 태어난 운명이기라도 한 것처럼.

네 살 난 손녀를 남겨두고 도일한 아들네에게서 어른의 애끊는 서사의 단초는 시작됐다. 39세에 혼자가 된 어른은 덮쳐오는 산 더미 같은 세파를 당신 몸으로 안았다. 손녀를 금쪽같이 키워 60년대에 시내 S여고를 졸업시켰다. 그 손녀를 내게 혼인시켜 손주사위가 됐으니, 그게 어떤 인연인가. 가슴 뭉클해 오는 대목이다.

어른은 출가한 손녀를 그냥 두지 않고 감싸고 품었다. 손주사위가 교원으로 살림이 궁색한 걸 알아 보리쌀 좁쌀이며 동네 해녀가 물질한 해산물 할 것 없이 우리가 사는 시내 집으로 바리바리 지고 왔다. “밥이 보약이여. 먹은 기운으로 사는 거여.” 만나는 족족 잊지 않고 하시던 말씀이다. 피붙이라고 손녀 하나였으니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눈물겨운 대목이다.

어른은 이 나라 근세사의 가파른 길을 굽이굽이 함께 헤쳐온 분이다. 4·3 때, 당시 면역소(지금의 읍·면사무소) 직원이던 둘째아들이 동료들과 함께 학살당했다. 죄명도 이유도 없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죽음이었다. 몸소 현장에 가 피로 물들어 알아볼 수 없는 아들의 시신을 거둬온 심경이 어떠했을까.

6·25전쟁 때, 전장에 나간 막내아들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곡기를 끊고 몇 날 며칠 오열했으리라. 시국이 안정됐는가 하는데, 일본 사는 큰아들이 명을 다해 관 속에 덮여 제주공항으로 돌아왔다. 또 식음을 폐해 몸져누웠다. 어른이 노쇠하시매 대신해 장례를 치렀다.

참척(慘慽), 세 아들을 앞세운 어른, 시대가 만들었지 어찌 당신이 하고자 했던 일인가. 떠도 눈물 감아도 눈물, 눈물 마른 날이 없었을 것이다. 구순에 이르러 어른을 부양키로 했다. 손자 집에 어찌 드느냐 하므로, 당신이 사는 읍내마을에 조그만 집을 짓고 모셨다. 파란만장한 생에 치매가 심했으나, 우리 내외가 정성으로 어른을 모셨다.

처가 벌초를 하던 날, 놀라운 일을 목도했다. “소그라이(수고해라.) ”새벽 다섯 시 문간을 나서는데 뜻밖에 어른의 굵직한 목소리다. “아, 예.” ‘이 시간에 어떻게….’ 얼떨결에 대답하며 놀랐다. 벌초를 마치고 들어서는데, 또 어른이 새벽 그 툇마루에 앉아 있지 않은가. “소갔져(수고했다.)” 새벽보다 더 굵고 밝은 목소리다. 황급히 어깨에 멨던 예초기를 내리며 달려가 어른의 마른 손을 잡고 말했다. “잘 허큼에 벌초 걱정이랑 맙서.” 어른의 눈이 붉어 있었다. 치매에도 벌초는 걱정하는가.

그 뒤, 처가 선묘와 함께 어른도 관음사 영락원에 봉안했다. 부부와 모자가 한 울안에서 화락하게 지내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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