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군사 기밀 탐지·일제 식민 통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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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 독립운동가 허봉학
한홍일, 대정군수…구휼·민폐 제거로 주민들 동비 세워
허갑, 필법과 문장 능한 학자…가시리 한학사유허비문 써
허경, 제주목 호적정리관…3개 국어 능통한 통역가·역관
허권, 전남대 의대 졸업… 제주도의사회 부회장·의원 원장
허록, 육군간호학교 대위 출신·순국용사 송서규의 미망인
허명, 제주목사…청렴결백한 치정에 ‘허멩이 문세’ 유래
허봉학, 항일 운동으로 옥고 치러…건국훈장 애족장 전수
허봉학은 일본군의 우도 무선시설과 지하격납고에 비행기를 숨긴 사실 등의 군사 기밀을 캐내었다. 사진은 대정읍에 위치한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허봉학은 일본군의 우도 무선시설과 지하격납고에 비행기를 숨긴 사실 등의 군사 기밀을 캐내었다. 사진은 대정읍에 위치한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한홍일(韓弘一):생몰년 미상, 대정군수. 1865년(고종2) 3월, 강이진(康履鎭)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67년 8월에 떠났다. 1866년(고종3) 8월 14일 새벽 2시경 제주판관 이남재(李南載)가 병사하자 대정군수 한홍일로 하여금 임시 제주판관을 겸임하도록 했다. 

재임 중에 하루 두 끼니만 먹으면서 남은 것을 모아서 구휼하고 민폐를 제거해서 주민들이 그에 대한 동비(銅碑)를 세웠다. 1867년 7월 대풍이 불었는데 대정 쪽이 가장 심했다.

▲허갑(許鉀):호는 한우(漢愚). 화북(벨도)에서 살았던 학자. 영운(靈雲) 고경준(高景晙)의 제자다. 필법과 문장에 능했다. 허나 저작이 일실됐다. 당시 명사들의 문집들에서 몇 편의 서문을 얻어 볼 수 있다.

최면암(崔勉庵)선생이 지은 한학사유허비문(韓學士遺墟碑文: 표선면 가시리에 있음)을 썼다.  

▲허경(許京):1805(순조5)~1885(고종22), 역관(譯官). 제주목의 호적정리관. 일명 허영(許潁), 본관은 양천, 구좌면 한동(漢東)리(궤-마슬)서동에서 무과급제 허석(許石)의 6대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중국·러시아에서 견문을 넓히고, 제주관아의 역관으로 본도에 표류한 외국인의 통역을 맡아보았다. 

1852년(철종3) 12월 중국 청나라 상선(商船)이 산남 대정현 범천포(犯川浦)(현 화순)에 표도, 허경은 중국어 통사로 표류 경위를 조사해 장계를 올리는 데 협력했다. 

3개 국어에도 능통해 한양(漢陽)에까지 잘 알려진 통역관, 장손으로는 6세손인 허기수씨가 한동리(漢東里) 서동에 거주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1864년(고종1) 제주목 관아의 호적정리관으로 임명돼 백성을 교도하면서 새롭게 호적을 완비시켜 후일 허호적(許戶籍)이라고 통칭됐다.

▲허권(許權):생몰년 미상. 서귀포시 서호동에서 태어나 제주농업중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서귀농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의학박사). 제주도의사회 부회장, 서귀포동산의원 원장.

▲허록(許綠)(여):?(일제시대)~2007. 순국용사 송서규(宋瑞奎)(1933~1967)의 미망인, 허(許)는 육군간호학교 대위 출신, 대한적십자사에서 30년 동안 보건학 강사와 의료봉사 활동을 해 왔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상과 전쟁미망인회에서 주는 국민포장을 받았다.

그의 외아들 송재용(宋在容)은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으로 서울에 거주, 남편 송(宋)대령은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제7기 소위로 임관, 1952년 2월 특수정보 교육을 하러 도미(渡美), 5·16 때 혁명검찰부장의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1966년 8월 월남전에 참전, 백마부대(보병 제9사단) 대대장이 돼 1967년 11월 6일 귀국 2일을 남겨 부하들을 잘 후퇴시키고 순국(殉國)했다.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제주도, 베트남참전유공자회, 갑종간부 7기동기회와 유족의 뜻을 모아 제주시 노형동 충혼묘지 입구에 2006년 5월 6일 송대령의 동상을 세웠다.

목사 허명(許溟) 휼민(恤民) 선정비(제주목관아지)
목사 허명(許溟) 휼민(恤民) 선정비(제주목관아지)

▲허명(許溟):생몰년 미상, 무신. 제주목사. 1814년(순조14) 4월에 김수기(金守基)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15년(순조15) 5월에 사직했다. 

잠녀들이 미역을 캐고 내는 수세(水稅)를 폐지시키고 자비전(自備錢) 900여 냥을 준비해 공용에 보충하도록 했다. 

목민관으로서의 치정(治定)이 청렴결백하다고 해서 도민들이 동비(銅碑)를 건립, 공덕을 기렸다.  제주 속담에 ‘허멩이 문세’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실효성이 없는 문서를 빗댈 데 쓴다. 허명이 목사로 재임 시에 채무로 인한 주민의 고민을 진정시켜준 문서라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허봉학
허봉학

▲허봉학(許鳳鶴):1917(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제주도 천주교 신도와 신부의 항일활동. 본관은 양천. 일명 허옥(許鈺). 원적은 전북 전주군 윤선면 구제리에서 허정문(許正文)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제주시 삼도리(제주-성안)로 옮겨 천주교 제주성당(남문로 입구) 소속 신자로서 당시 미싱 판매상의 점원이다. 

이 사실이 일경에 발각돼 1941년 10월에 체포된 그는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아일랜드 사람 손신부(孫神父)와 함께 중일(中日)전쟁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평하는 한편 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그리고 소위 육군형법·해군형법에 의해 징역 1년 6월을 병합으로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해방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전수했다. 

일본이 대륙 침공을 본격화하면서 한국 독립이 가까워 오고 있다고 확신, 모슬포 해군 비행장의 군사시설을 관찰하는 등 1938년 이후 일본군의 군사상 비밀을 탐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모슬포비행장에 지하 격납고(格納庫)가 있어 비행기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비롯해 우도(牛島)에 설치된 해군 무선시설 내용 등 군사 기밀을 캐내어 손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도들에게 알려줬다. 

한편, 정전이 잦은 것은 일본이 전쟁물자 동원에 따른 중유의 부족현상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뿐만 아니라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민족 말살을 획책해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더욱 강요하자,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신격화하던 일본왕을 풍자적으로 조롱하거나 야유하면서 식민지 통치를 비난했다. 

1941년 12월 그는 손 신부의 집에서 동지들을 모아 미일간(美日間)의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한국인에 대해 지원병을 모집하게 될 것이고, 그 수가 매년 3천여 명에 달하게 되면 그 가운데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지도해 지원병들을 단결시켜 봉기하면 독립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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