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허리에 띠 두른 식민지 수탈과 침탈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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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질토래비 창립 5주년 및 총서 창간호 출판에 즈음한 한라산 특집

세칭 하치마키 도로명 실체 모호
일제 계획엔 ‘환상선’ 신설 포함
중산간 일대 총연장 110㎞ 달해
한라산 횡단도로 도민 강제 동원

쇠로 된 오랜 도구와 연장 널려
역사 문화 연구 통해 설명 필요

▲세칭 하치마키 도로명 유감

‘질토래비 제주역사문화의 길을 열다’ 189호가 연재됐던 지난 수요일, 필자는 독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세칭 하치마키 도로에 대한 유감의 내용에 더하여 한라산의 길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싶다고도 했다. 다음 날 필자는 독자가 지참한 방대한 자료에 경외감마저 들 정도였다. 독자는 ‘제주건설사’라는 700여 쪽의 증보판을 2020년 발간한 제주도 건설교통국장을 지낸 김중근님이다. 필자에게 제시한 유감스러운 자료 중에는 1982년 발간된 ‘제주도지’에 ‘(일제는) 일본군 20만명을 한라산에 주둔시켜 하치마키 도로(약 35㎞)를 만들었다’라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조선총독부 관보 등의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일본군 주둔 병력은 20만이 아닌 7만5000명이다. 하치마키 도로에 대한 기록 역시 위의 제주도지 이외에는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런데 필자가 한라산 둘레길에서 만난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하치마키 도로:일제가 한라산 중허리를 돌아가며 건설한 하치마키 도로 흔적은 동백길 구간에서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정사에서 출발하여 약 5.5㎞ 지점을 전후한 둘레길에서 하치마키 도로는 길게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는 특히 길을 만들기 위해 바위를 굴착했던 흔적인 착암기 구멍이 바닥에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위를 깨뜨리고 낮은 곳은 메워가며 평탄작업을 했던 흔적으로서 당시 도로 개설 과정을 엿볼 수 있는 현장들이다.”

전 제주도 건설교통국장을 지낸 김종근님(사진 오른쪽)이 한라산 길에 관련된 자료를 질토래비에 전달했다.
전 제주도 건설교통국장을 지낸 김종근님(사진 오른쪽)이 한라산 길에 관련된 자료를 질토래비에 전달했다.

위의 안내판 기록과는 달리 일제가 1937년 발표한 ‘제주도 도로개발 10개년 계획’ 중에는 한라산 중산간 지대를 순환하는 환상선(環狀線)을 신설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김중근 전 국장에 따르면 실체가 모호한 ‘하치마키’라는 도로명이 1982년 발간된 제주도지에서 처음 사용된 이후 여기저기에 인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한편 일본군 병참로로 불리는 길은 원래 한라산 도처(14개소)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임도로 개발된 도로였다. 게다가 수탈한 임산자원을 지금의 제주항인 산지항까지 수송하기 위해 1937년 일제는 환상선(環狀線)이란 이름의 도로를 개발하였던 것이다. 한라산 중허리인 600고지 중산간 일대를 순환하는 환상선 도로는 3등급 신설도로로 총 연장 110㎞, 도로 너비 10m 규모였다. 일제는 이 개발계획을 통해 환상선과 해안지대 및 중산간의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14개 노선을 또한 신설했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제주도를 방어의 기점으로 삼겠다는 전략(결7호)으로 이 도로를 군사용 도로로도 개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 말기 방어진지가 설치된 오름을 연결하면서 물자를 운반하거나 군사시설 구축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이 도로는 해발 900m 지대인 어승생 수원과 어승생악을 중심으로 한라산록을 띠를 두르듯이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서쪽으로는 지금의 한밝교와 영실을 거쳐 법정악으로, 동쪽으로는 수악교 상류와 성판악에서 물장올·관음사·천왕사로 이어졌다고 전한다. 이 길은 일제가 식민지 침략과 수탈 용도로 사용하기도,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군사용 도로로 이용됐던 침탈의 길이었다.

▲한라산의 길

인간은 길을 내며 살아왔다. 탐라국과 고려 시대에는 성주청(星主廳) 중심으로 삼성혈과 칠성대, 그리고 대촌현(제주시) 중심으로 15현 등을 잇는 길이 실재했을 것이다. 한라산 총서(한라산 생태문화연구소, 2006) 등에 의하면, 제주도에 교통로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인 1416년 제주목·정의현·대정현 3읍 체제가 정착되면서부터라 한다. 제주읍성과 정의현성, 제주읍성과 대정현성, 그리고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들어섰던 것이다. 이 길들은 위치에 따라 각각 ‘웃한질’로 불리는 상대로(上大路), 대로(大路), 하대로(下大路)로 구분하여 이용되었다. 이 밖에도 주요 마을들을 연결하는 소규모 길인 중로(中路), 소로(小路) 이외에도 제주목사의 순력로(巡歷路), 목마장 가는 점마로(點馬路), 지역로(地域路) 등이 있었다. 일례로 1899년 편찬된 정의지도에 의하면, 호근리, 상효리, 한남리, 수망리, 정의읍성, 수산리, 상도리를 연결하는 도로를 대로(大路)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중산간도로의 토대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에는 1911년 도로법을 공포한 이후 조선시대 교통로 명칭인 대로·중로·소로를 폐지하고, 1등·2등·3등·등외로 정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도로들은 한라산 횡단도로와 환상선(環狀線, 세칭 하치마키)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존의 도로를 보수하거나 확장한 것이라 한다. 너비 6m로 1932년부터 개설되기 시작한 제주와 서귀포 사이의 한라산 횡단도로는 지금의 제1횡단도로(5·16도로)의 토대가 된다. 일제는 여러 도로 개설 과정에서 도민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했음은 물론 토지 또한 강제로 몰수했다. 특히 1945년 초 일본군 제17방면군 소속 제58군사령부(사령관:도야마 노부루 중장)는 기존의 임산물과 표고버섯 등을 실어 나르는 도로를 군사도로로 확대하기도 했다. 

수악길 주변에 있는 일제 제재소(또는 표고버섯 공장) 추정지에 남아있는 연장들.
수악길 주변에 있는 일제 제재소(또는 표고버섯 공장) 추정지에 남아있는 연장들.

▲통나무 제재소 추정지에는 안내판이 아직 없다

한라산 둘레길을 걸으며 유심히 살핀 것 중 하나는 쇠로 된 오래된 도구들과 연장 등이 널려 있는 지역 주변 관찰과 그 용도에 대한 탐색이었다. 도르래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되는 쇠 연장 등 10여 개의 도구들이 수풀 속에 가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대한 안내판은 아직 세워져 있지 않다. 계곡과 습지로 에워싸인 이곳 주변은 물 이용이 수월하여 공장이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럼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행해졌을까? 이에 관한 안내의 글은 이곳뿐만 아니라 옛 기록에서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을 안내한 고수향 세계유산 해설사이자 질토래비 전문위원은 한라산 도처에서 베어진 통나무들을 제재하거나 표고버섯과 관련된 공장일 거라고 추정한다. 관계기관에서는 연구용역 또는 정밀탐색을 통하여 이곳에 관한 역사문화에 대한 안내판과 함께 책자에도 포함하여 함께 소개하길 기대한다. 일제의 제재소 또는 표고버섯 관련 공장지대로 추정되는 이곳은 제1횡단도로변에 위치한 수악길 입구에서 서쪽방향으로 3㎞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필자는 뱀 두 마리를 만났는데 한 마리는 앞에서 스스로 사라졌지만 한 마리는 머리를 들고 방어공격을 하려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노려보는 뱀이 독사라는 말에 한 번 더 쳐다보게 만들며, 길 위에서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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