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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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수필가

차창 밖의 열기가 만만치 않은 낮 시간에 차를 운행하다가 신호 대기 중에 할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횡단보도 지나가는 모습이 눈이 들어왔다. 십 대쯤으로 보이는 명랑한 인상의 손녀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약간 서툴기는 해도 정성껏 보조하고 있었다. 착한 성품이로구나, 손녀 잘 두어서 할아버지가 많이 위안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횡단보도를 다 건너 인도에 다다르자 소녀는 안심한 듯 별 말없이 조용히 할아버지와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약간 머뭇거리는 듯 서 있으면서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고개를 돌려 보고 또 보았다.

이 예상 밖의 상황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 나니 순간 생각이 정리된다. 아마도 횡단보도를 지나게 된 소녀가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도움의 손길을 드린 것 같다. 남이라는 거리감을 느낄 새 없이 순간 한마음이 되어 정성을 다한 모습이지 싶다. 내 상상이 맞다면 할아버지도 일면식이 없는 소녀에게서 진심 어린 도움을 받은 일이 뜻밖이었을 게다. 물론 소녀가 인도를 안 했었어도 건너가기야 했겠으나 그 소녀의 착한 마음씨가 어르신을 감동시켰을 터이고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된 나 또한 진한 여운과 함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질 않는다. 나라면 만약 이런 경우 어떻게 했을까 하고 소녀를 통하여 나를 돌아보게 된다. 거리가 멀어서 소녀의 고운 마음씨를 칭찬해 주지 못한 아쉬움은 지금도 남아있다. 물론 칭찬받으려고 한 건 아니었겠지만 반바지 차림에 야구모자를 쓴 발랄하고 철없을 듯한 소녀에게서 예상 밖의 모습을 본 것은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와 관계없는 일이라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겠는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배려심이야말로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신성이 작용했음이리라.

우리말 중에는 나와 남과의 경계를 두지 않고 모두가 조화롭고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이 담겨있는 말들이 있다. 내 것이라기보다 우리 것,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 우리 남편 등. 나보다도 모두를 아우르는 깊은 뜻을 엿 볼 수 있다. 말이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우리 옛 선인들의 덕망 높은 지혜가 감탄스럽다. 늦게 서야 나 역시 이제 이 말의 의미를 차츰 공감하게 되는 걸로 보아 나이가 들었음이지 싶다.

비현실감이 들 수도 있겠으나 하나에서 시작하여 하나로 돌아간다는 옛 경전에 문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나만을 내세우는 이기심보다 우리 모두 하나라는 일체감을 느낌으로 하여 적이 없게 되고 남도 나인데 서로를 보호하고 도우려 하게 될 것은 당연하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요즘 종종 보도되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서 사람 안에 잠재해 있는 선악의 양면성을 제삼 느껴본다. 수성獸性인 마魔의 본성이 절정에 이렀지 싶다. ‘우리’라는 말의 의미와 같이 피해를 당하는 상대가 남이 아닌 우리 형제자매, 더 나아가 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해도 이런 우를 범하려는지 잠시 눈을 감는다. 신성인 양심이 살아나서 우리라는 도덕적 정서가 작게는 나와 이웃 크게는 전체. 인류사회에 확산되어 모두가 하나임을 인식하여 상대를 위하는 일이 나를 위하는 일이고 나를 위하는 일이 상대를 위하는 일임을 깨달아 화목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하고 터무니없는 공상을 하다가 뒤에서 울리는 정적소리에 눈을 떴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행한 데로 돌아온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도 다시금 꼭 새겨 볼 일이다. 조금 전 그 소녀의 꾸밈없는 행동은 오염되지 않고 맑고 순수한 본래 우리 양심의 모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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