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바삐 재촉하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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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시인·수필가·前 애월문학회장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더니 바람 한번 설핏 불자 가을이 발치에서 맴돌고 있다. 입추와 처서가 엊그제 같은데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이 그제께였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때가 되면 절기에 눈길을 주는 것은 마무래도 시골 촌놈인 내게는 24절기란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등치되곤 한다. 추석 무렵이면, 가을 햇살에 취한 감나무 열매들은 성글어지는 잎사귀에 비례하여 주홍빛 얼굴이 발갛게 짙어간다. 집 뒤 언덕으로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면 넓은 들판이 제법 가을빛도 완연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린 바람에도 한없이 낮은 자세로 몸을 낮추었던 억새들이 은갈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부드럽게 일어서면서 나를 닮으라 나를 닮으라 서걱이고 있다. 하늘이 온통 파아란 얼굴을 내밀고 가을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산을 보아도 벌판을 보아도 가을이 빛나고 가을이 영글고 있다.

젊은 시절은 참 더디게도 갔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해도 여전히 나는 이십대였다. 이 시절, 젊음이 언제나 내 옆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사십 대로 접어들자 시간은 서서히 내게 곁을 주지 않았다. 이게 웬일인가. 육십이 넘자 손으로 움켜쥔 물처럼, 시간에 가속이 붙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빠른 속도로 나이를 먹어 이젠 칠십이 되었다. 그러나 입추, 처서 다 지나고 추분 무렵이 되면 정말 올 한 해도 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의 삶이 흐르는 게 어찌 내 탓이랴! 보이지 않는 우주의 질서에 있어서는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추분이면 벌써 한해의 끝자락이 저만치 모습을 슬며시 드러내는 시기이다.

낮이 눈에 띄게 짧아졌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눈길 한번 돌릴 때 마다 어둠이 성큼섬큼 다가오는 게 느껴질 정도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이라고 하지만, 여름날의 긴긴 낮을 한동안 기억하는 우리에게는 낮이 짧아지는 절기로 다가온다.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 숲 너머로 어둠이 다가오면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시계를 보면 오후 네 시 무렵이다. 낮이 짧아 졌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적 판단일 뿐, 사실은 밤과 낮의 길이를 가장 팽팽한 상태로 하루를 만들어내는 절기가 바로 추분 무렵이다. 추분이 지나면 먼 산을 감싼 푸르스름한 저녁 안개도 한결 짙어진다. 무더위에 지쳐 있던 온갖 물상들이 몸을 세우자 서늘한 가을 기운이 한해의 살림살이를 정리하라고 재촉한다. 마음은 벌써 뭔가 추슬러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다급해지기 십상이다. 흰빛 이슬이 어느새 달빛과 함께 온천지를 슬며시 적셔 놓듯이, 하얀 서리가 가득한 가을이 서려 있다.

이제 곧 추석이 지나면 감귤원 농막 앞 광령 저수지에도 천둥오리와 겨울 철새 떼의 날갯짓이 어지럽게 오르내릴 것이고 저수지 수면은 가을햇살 고운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그리고 거울 같은 수면에 나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이 성큼성큼 다가와도 결코 흔들리거나 조바심 내지 않는 편안함.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을 바삐 재촉하는 모든 외물을 거부하는 강력한 힘이 아닐까.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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