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 간직한 한라산 둘레길… 비경과 치유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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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시원·제주의 자존
무오법정사 항일투쟁 66인

서귀포경찰서 주도로 구축
시오름 주둔소…주민 강제동원

원시림 속 산정화구호…절경

▲다시 찾은 무오법정사 사당인 의열사와 하원도수로


한라산 도처에서 만나는 풍경은 친근하면서도 경이롭다. 1918년 ‘무오법정사 항일투쟁’에 참가했던 66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를 다시 만난다. 이른 시간이라 문이 잠긴 의열사를 향해 두 손 모으는 것으로 영령들에 대한 추모의 정을 대신하였다. 무오법정사는 대한민국 항일투쟁의 시원이 담겨 있는, 제주의 자존이 깃든 곳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무오법정사의 항일투쟁에 대한 안내는 130회 전후하여 연재된 내용으로 대신한다. 의열사 진입로 좌측에 들어선 한라산 둘레길 입구를 알리는 구조물을 지나면 1950년대 구축된 물길인 하원도수로를 만난다. 이 수로는 영실에서부터 이 근방까지 4㎞ 이상 연결되어 있다. 논농사와 관련된 유적인 하원도수로는 실제로는 논농사에 별로 활용되지 못했다. 새로운 황금작물인 감귤이 논농사에서 얻어지는 경제적 가치보다 월등히 나았기 때문이라 한다. 반면 1840년대 구축된 안덕면 사계리의 ‘김광종 도수로’와 1900년대 구축된 천제연의 ‘채구석 도수로’는 지역경제에 공헌한 바가 상당히 컸다고 전한다. 위의 수로들을 ‘산남의 3대 수로’라 칭해본다.


▲또 하나의 시오름 4·3주둔소

시오름 주둔소 안내표지판.
시오름 주둔소 안내표지판.


숲길 사이로 난 돌길을 걷고 계곡을 건너느라 온몸이 무디어도 주변풍경에 취하다보니 무딘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진다. 그렇게 가다 또 하나의 ‘시오름 4·3주둔소’의 유적을 만났다. 시오름 4·3주둔소는 두 곳에 있다. 134회 연재에서 이미 소개된 시오름 주둔소는 ‘잃어버린 마을 영남리’에서 동쪽 방향으로 난 제2산록도로변 남쪽에 있다. 시오름 아래쪽 주둔소의 성담들이 꽤 남아 있으나, 동백길에 위치한 위쪽의 주둔소는 축성된 얼개만 남아 있었다. 길이가 20m, 높이가 2m 내외인 외성은 삼각형 모양이고, 생활공간으로 이용된 10여 미터의 내성은 사각형 모양이다. 겹담으로 쌓은 외성의 동서 양쪽으로는 감시용 망루가 무너진 채로 남아 있다. 오승국(전 4·3평화재단 팀장) 질토래비 전문위원에 의하면, 한라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주둔소 유적은 아래 주둔소의 전초(前哨)기지였을 거라고 들려준다. 전초기지란 적진 맨 앞에 구축된 공격용 진지이다. 서귀포경찰서의 주도로 구축된 시오름 주둔소는 주변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들어섰으나, 70년이 지난 지금 주둔소 주변 풍경은 정령이 깃들 정도의 밀림이 압권이다. 이곳은 또한 인근 마을들인 서호·호근·강정·법환 등지의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한 달여 만에 성담을 쌓아야 했던 아픔의 현장이다. 이에 ㈔질토래비에서는 주둔소 주변을 배회하는 영령들에게 해원제(解寃祭)를 올리기도 했다. 


다음은 해원제 축문의 일부이다. 

축문을 고하는 질토래비 문영택 이사장.
축문을 고하는 질토래비 문영택 이사장.


‘ …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니 이제 통일의 세상이 오는 줄 알았더이다. 그러나 선인들의 바람과 달리 탐라 천년의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는 처절한 아픔을 영령들께서는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지요. … 이제 국가권력에 의한 지난날의 제주 학살을 정부가 사죄하고 돌아가신 영령 후손들에게 배보상 하는 세상이 되었나이다. 그 긴긴 세월 4·3의 아픔 속에서도 한 마음 되어 일구어 놓은 지금의 제주를 이곳 영령들도 지켜보고 있겠지요. 부디 지난날의 아픔을 내려놓으시고, 반성할 일이 있다면 반성도 하시어,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영령들께서도 인도해주시옵길 바라옵나이다. … .’

대개의 주둔소는 무장대와 주민과의 연결을 차단하는 한편, 토벌대의 근거지로 사용하려 1950년대 초반에 구축되었다. 한편 1951년 1월 해병 1개 중대가 제주경찰과 합동으로, 이어 동년에 창설된 제100전투경찰사령부가 필승·충성 중대 등 6개 중대로 편성되어 무장대 토벌에 나섰다. 이후 한라산에 오른 무장대에 대한 토벌은 경찰이 주도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한라산 밀림지대와 중산간 마을 사이 주요 지점마다 40여 개소의 주둔소가 구축되었다. 시오름 주둔소도 이 시기에 축성되었다 한다. 대개의 주둔소는 사각형 형태로 쌓아졌는데 시오름 주둔소는 삼각형 형태이다. 그동안 골프장과 도로 건설, 과수원 조성 등으로 적지 않은 주둔소들이 사라지고 있는 반면, 두 곳의 시오름 주둔소는 성채 형태가 양호한 편이다. 당시의 청년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다 보니 청소년들이 협조원이라는 이름으로 주둔소 관련된 일 등에도 경찰과 함께하였다고 한다. 


▲원시림에 감춰진 무명의 산정 화구호


하루해가 기울어져 갈 즈음 들어선 수악길 여정에서는 한라산 원시림 속에 감춰진 산정 화구호도 만날 수 있었다. 이 화구호는 여느 오름처럼 분화구 형체인 굼부리도 있다. 오래전 화구호 안에는 화산이 터진 분화구에 물이 고인 호수나 습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이곳은 경사가 심한 주변 지형에 의해 감춰져 있었다. 화산체의 형체는 대부분 사라지고 분화구의 흔적만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주 오래전 한라산 정상부로부터 쏟아진 다량의 용암류가 경사진 곳을 따라 주변으로 흘러갔을 것이고, 이곳에 이미 형성되었던 화산체는 흘러온 다량의 용암으로 인해 대부분 매몰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분화구를 에워싼 산체의 이름은 아직 없다. 새로운 오름 하나가 더 추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면 산정 화구호에 대한 안내판의 내용 또한 어렴풋이 그려지는 절경이다.


▲한라산 둘레길 특집을 마치며


한라영산의 비경과 비사를 만나려 숨은 보석을 캐듯 온종일 걸었던 둘레길. 질토래비 답사팀이 걸었던 동백길과 수악길 등지에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성지였던 무오법정사와 4·3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시오름 주둔소, 논농사용 하원도수로, 일제가 파헤친 병참로, 숯 가마터와 표고버섯 재배지의 유적,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재소 추정지, 무명의 산정 화구호, 10소장의 상잣성, 동백나무 및 편백나무 군락지, 10여 개의 계곡 등을 만나는 환상적인 숲길이었다. 산과 숲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은 회색빛 도시를 벗어나 초록의 향연을 즐긴 치유의 시간이었다. 5만 보 이상을 걸었으니 한라산 정상 다녀온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걸었던 셈이다. 이제 신선들의 숲 대궐이었을 한라영산 영주산을 뒤로하고, 다음 호부터는 영주십경 중 으뜸인 일출봉의 마을 ‘성산포’의 역사문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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