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철학자도 못 했던 아이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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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석 제주대학교 교수 경영정보학과/논설위원

볼링장에서 프로 선수들이 볼링공을 던지면 직진하던 볼링공이 갑자기 휘어지며 볼링핀들을 모두 쓰러뜨린다. 인류의 역사를 볼링장의 볼링공으로 비유하면 20세기는 과학과 철학이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급선회하며 발전한 시기였다. 이런 변화의 시발점에 버트런드 러셀과 그의 제자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컴퓨터의 등장과 인공지능 기술의 탄생에 대해 뿌리를 캐보면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에서 시작한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모두 특이하게도 초등학생을 직접 가르친 경력이 있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초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모든 걸 머리만으로 해결하려고 했기에 아이들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초중등 학교의 교사는 대학교의 교수보다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초중등 학교 교사는 위대한 철학자도 못 했던 아이들 교육을 하고 있다. 


시곗바늘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움직이면서 작동한다. 기계 부품들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계산기처럼 러셀은 논리 기호들의 결합으로 사람의 논리를 이해하는 논리 원자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수학 원리’라는 책에서 362페이지 분량에 걸쳐 “1+1=2”를 논리 기호만으로 증명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은 수학 원리의 내용을 컴퓨터가 증명하는 최초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사이먼은 컴퓨터 기계가 논리 기호를 이용해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것을 입증했다. 1927년에 55세였던 러셀은 비콘 힐이라는 대안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 권위에 의한 주입식 교육보다 규칙 없는 자유를 줬다. 어린 학생들은 무제한의 자유를 바라며 제멋대로 행동했고 이 모습에 러셀은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러셀은 학교 운영에서 손을 떼었다. 


러셀의 제자 비트겐슈타인은 1999년 타임지가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끼친 100명을 뽑을 때 철학자 중 유일하게 선정됐다.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전투에 참여해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군 복무 중에 틈틈이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을 썼다. 그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그의 원고가 러셀에게 전해져 논리-철학 논고가 출판됐다. 전쟁에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되기를 원해 케임브리지대학이 아닌 사범대학을 다녔다. 그는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그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자상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수업을 쫓아오지 못하는 학생에게 화가 나서 체벌하는 선생님이 되고 말았다. 그는 기하학 시간에 아이들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잡아채며 체벌했다.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열어 비트겐슈타인을 내쫓기로 했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복귀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한 기차역에는 비트겐슈타인을 보려고 케인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몰려들었다. 


초중고 학생들은 학생마다 제각각 발달 수준이 다르고 학습능력에도 큰 편차가 있다. 성장통을 겪어야 하기에 지금 당장은 쾌락적 감각추구 성향이 강한 아이가 오히려 나중에 훌륭한 성인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학생의 개인적인 어려움과 발달과정을 이해하고 학생이 집중하고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교사에게 많은 역량이 필요하다. 초중등 교사에 대한 사회적 지지와 존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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