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철의 색다른 제주여행] 대 이은 ‘눈엣가시’ 신세…운명인가, 뜻 품은 역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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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추사 김정희와 4·3 김달삼(상)

숙청으로 제주 유배 이세번…

신축민란 주도 12대손 이재수와

4·3봉기 주도한 후손 김달삼…

추사 김정희와 얽힌 기묘한 인연

본관이 전라북도 고부(古阜)인 이세번(李世藩, 1482~1526)은 마흔 직전에 제주로 유배왔다. 중종 때의 기묘사화 과정에서 불의(不義)를 느껴 탄원했다가 반대파에 의해 조광조 일당으로 몰려 숙청된 것이다. 아직 젊었던 그였으나 끝내 육지 땅을 밟지 못했고 6년 후 제주 섬에 묻혔다. 육지서 급히 내려와 부친을 묻은 두 아들이 섬에 남아 정착하면서 제주에 고부 이씨 후손들이 대를 이었다. 

1901년 신축민란을 주도한 대정 사람 이재수(1877~1901년)가 이세번의 12대손이다. 1948년 4·3사건을 주도한 대정 사람 김달삼(1923~1950년)은 이세번의 14대손이다. 제주 섬 근현대사에 복합적 의미의 큰 파란을 불러온 두 번의 민란 주역의 탄생이 수백 년 전 이 섬에 유배 온 선비 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김달삼의 본명은 고부 이씨 이승진(李承晉)이다. 4·3 발발을 주도한 그는 5개월만인 1948년 8월, 이덕구에게 무장대 총사령관 직을 넘겨주고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다. 1949년 6월 후임자 이덕구는 군경과 교전 중 최후를 맞았고, 월북한 김달삼 또한 1950년 초에 남파되어 태백산맥 일대에서 유격대 300명을 이끌다가 6·25 발발 3개월 전 토벌대와 교전 중 사살된다. 이덕구와 김달삼, 어쨌든 제주가 낳았고 제주를 고향으로 하는 20대 제주인 두 사람은 9개월 간격으로 군경에게 사살되어 머리까지 잘렸다. 

대한민국 땅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지명이 두 군데 있다. 제주 사려니숲길 주변의 ‘이덕구 산전(조천읍 교래리 산 137-1)’과 강원도 정선의 아우라지 인근 골짜기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다. 이름 뒤에 붙은 ‘산전’과 ‘모가지잘린’이란 문구가 서로 대보적인 어감을 풍긴다. 두 제주인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는 듯싶다. 전자의 ‘산전’은 소소지만 추모의 발길이 조금씩 늘어나는 반면, 후자인 ‘~잘린골’은 일반에게 지명조차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강원도 현지 사람들조차도 근처에 가기를 꺼리는 곳이 되었다. 

제주 유배인의 후손 김달삼은 또 한 사람의 제주 유배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바로 추사 김정희(1786~1856년)다. 추사는 1840년 55세 나이에 제주로 유배왔다. 1848년 해배(解配)되어 육지로 돌아갔으나 다시 정쟁에 휘말리며 한 번 더 유배를 가는 등 파란의 말년을 보내다 70세로 생을 마쳤다. 제주에서의 8년 동안 추사는 대정읍성 안동네 두 사람의 관리 집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초기 1년여는 송계순의 집이었고 이후 더 넓은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져 남은 세월을 보냈다. 

지금의 대정읍 안성리 1681-1번지와 1661-1번지인 두 곳은 현재 ‘송계순집터’와  ‘추사유배지’란 공식 지명으로 여행자들의 발길을 맞아들인다. 당시 이 지역 유지이자 부자였던 강도순은 추사를 한낱 유배인이 아닌 중앙정부 고위 관료를 집에 모시는 자세로 대했던 모양이다. 덕택에 추사는 낯설고 외로운 환경에서 그가 좋아하는 분야에 몰두할 수 있도록 모자람 없는 공간과 분위기를 제공받았다. 추사체가 완성되고 명작 ‘세한도’가 그려지는 등 그의 위대한 성취가 이뤄진 근간이 된 것이다. 

읽고 쓰고 그림 그리고 사색하는 일상 외에 추사가 또 하나 힘을 쏟은 분야는 ‘가르치는’ 것이었다.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 200년 이상 지속되면서 육지 문물을 접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제주인들에게 추사라는 인물은 대단한 존재였다. 여유 되는 신분이라면 누구나 자신은 물론 자식들까지 보내어 추사의 제자가 되고자 했고 추사 또한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강도순의 집이 이 지역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추사학당이 되면서 가장 큰 교육적 혜택은 당연히 집 주인과 그 일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당대는 물론 후손들에까지 추사의 정신과 가르침이 영향을 미쳤을 것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특히 추사가 살았던 그 집에서 나고 자란 강도순의 증손자 강문석(1906~1955년)은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해방전후 우리 현대사에 꽤 이름이 오르내린 엘리트였다. 일제강점기에 죽산 조봉암(1899~1959)과 함께 상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해방된 조국에선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공산당 서기장과 상호 협력방안을 논의하기도 하였고,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으로 건너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이후 강문석은 북한 정권하에서 노동당 사회부장과 상무위원 등 고위직을 거치다 박헌영 일파와 함께 숙청되어 1955년쯤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 말기에 강문석은 일본 유학파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고향 후배 이승진을 사위로 삼았다. 마흔 직전인 장인에게 이승진은 믿음직스러운 엘리트 청년이었고, 20대 초반인 사위에게 강문석은 우러러볼 만한 경력에 하늘같은 은사와 다름없었다. 해방 후 제주에 돌아와 대정공립초급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고향 후배들에게 사회 과목을 가르치던 이승진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부장에 임명되고 4·3 봉기를 주도하기 직전부터 ‘김달삼’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한다. 장인 강문석이 상해에서 항일운동할 때 썼던 가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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