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 동장님께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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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출구도 퇴로도 없다. 애초 선택되지 않았다. 선 자리에 버텨 있을 뿐, 지(地)의 이(利)가 있을 턱이 없다. 바람도 지레 저를 위한 마련이 없는 걸 앎인지 그냥 지나간다. 자동차 소음에 새의 내왕도 뜸한 자락.

연동으로 이사와 이곳 사정에 어둡고 낯선 공기가 서먹해 산책에 나섰다. 한화가 아파트를 짓는다고 판을 벌인 길모퉁이를 돌아나온다. 순박한 섬사람들은 큰손이 벌인 건설 현장에서 날품팔이로 하루를 걷어내는가. 자재를 들어 올리다 우뚝 공중에 멈춘 대형 철탑이 흉물스럽다. 서른 해를 눌러산 읍내에선 본 적이 없는 풍경이다.

맥 풀린 다리가 작은 숲 난간에 몸을 기대 세우는데, 눈앞 한 그루 소나무에 움찔 놀란다. 오싹하게 주위를 압도하는 저 위의(威儀). 물이 흐르다 멈춘 건천인가. 비스듬히 내린 지반이 퇴적층을 만들었고, 거기 좁디좁은 밑바닥, 잡풀과 잡목으로 얽히고 설킨 덤불 속인데도 아랑곳 않고 무뚝뚝하게 서 있다. 기골 장대한 위풍에 기를 팍 죽여놓는다. 말을 잃은 지 오랜 듯 바위보다 굳게 다물어 묵언 중인 입. 자지레하게 기어오르는 넝쿨들에 밑동은 파묻혔고, 줄기의 반쯤은 둘레를 알아볼 수 없게 겹겹이 휘감겼다. 눈대중이나 한 아름으론 어림없겠다.

잡다한 풀들이 마치 나무를 졸졸 따르는 진중의 군졸들 같다. 나무는 온몸으로 그것들 편안히 몸 맡기라 등 내민 어미 같다. 저 소나무, 그것들에 휩싸여 기꺼이 품을 내주고도 저는 저리 무덤덤한가. 도대체 제 삶이 있긴 한 건가. 저러고 온갖 풍상을 버텨 온 결기가 놀랍다. 수평 수직으로 층층이 뻗은 굵직한 가지들, 올려다보거니 위로 치솟는 기운을 떠받친 들보 같은 우듬지의 안정감, 줄기와 가지들 위 아래의 절묘한 조화에 감탄한다.

너끈히 수령 이백 년은 넘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저토록 번성하니 노송이란 말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하겠다. 우러르거니, 천년을 독야청청하리라.

시답잖은 생각일까. 저 소나무를 궁벽한 곳에 놓아둘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도민의 집 도청 인근이나 사람이 많이 찾는 어느 근린공원 볕 바르고 바람 좋은 곳에다 이식했으면 어떨까. 혹여 장비를 들이대면 펄펄 뛰며 격노할지 모른다. 자족하니 그냥 두라. 두 눈 부릅떠 불호령할까. 하늘을 갈라놓는 천둥소리로 꾸짖지는 않을까. 내 잣대일 뿐, 저 나무의 눈이 아니고 방식이 아니고 원칙도 기준도 아니다.

오늘 아침 안개가 짙으니 한낮 볕이 뜨겁겠다. 열기가 걷혀갈 이른 저녁쯤 울울한 숲과 높은 빌딩의 그늘을 지나 저 소나무를 찾으려 한다. 사람들은 더위에 처져도 나무는 여상히 청청할 테니, 말을 자주 걸어야겠다. 저 소나무가 지닌 내밀한 침묵의 의미와 깊이와 무게의 그 두께를 설렁설렁 풀어내고 싶다.」(2020.7.10. 제주일보 김길웅의 ‘안경 너머 세상’)

건강 탓에 나무를 못 찾다, 근 3년 만의 대면에 까무러칠 뻔했다. 나무가 누렇게 죽어가고 있잖은가. 협착한 속에 갇힌 채 가쁜 숨을 할딱이는 모양새다. 거송을 그냥 놔 둘 수는 없다. 장비를 투입해 옮길 수 없을까. 안타까워 동장님께 하소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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