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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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라 한다. 은유다. 산다는 게 호락호락한가. 적절한 빗댐이다. 오늘 당장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하는 말일 테다. 내 인생을 보다 극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해, 혹은 변환시키기 위해 사건을 끌어들이고 유효적절한 화소를 엮어 넣고, 군데군데 반전의 고비를 배치해가며 짜 맞춘다 해도 드라마라 하긴 쉽잖다. 그건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보려는 한낱 꿈같은 욕망일 뿐, 삶 가운데 부대끼는 현실은 말 그대로 폭풍의 바다다. 두 다리로 발 디뎌 세우고 선 육지가 몇 십 억 인구를 버텨낼 정도로 튼실한 대지의 기반이라 하나, 집 더미 같은 파도보다 더 높은 게 이곳 세상의 파도, 세파다. 그것을 넘으며 짊어져야 하는 게 우리가 겪고 있는 인생이라는 과부하가 아닌가.

여든에 이르러 이따금 젊은 날을 되짚어보게 된다. 허둥지둥 달려와 회상의 공간에 펼쳐지는 것들-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성취와 좌절에서 겪었던 환희와 절망의 그 순간 순간들을 오늘로 불러들이니 팔딱거리는가 하면, 어느 대목에선 터져 나오는 속울음에 한없이 느껍기도 하다. 그때 조금 엉성하게라도 극본이 있었더라면, 오늘의 나와는 판이 달라졌을 것인데….

문청 시절 같은 그 낭만의 젊은 날, 내게는 인생의 극본이 없었다. 비좁은 무대에 때 묻지 않은 백지 몇 장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써보지 않은 극본을 쓸 재간이 내겐 없었다. 써보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쓸 엄두를 못 냈다. 극본은 글로 쓰는 시나 소설, 수필과 다르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기도 했다. 극본은 말 그대로 각본, 단지 입으로 읽는 게 아니다. 무대에 펼쳐 놓기 위한 일종의 현장 설계이고 장치이고 가설물이다. 나를 극화하는 마당에 필요하다면, 나를 대리할 감독을 내세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더러 바꾸거나 분량을 더 늘리거나 줄일 수도 있다. 관중에게 감동으로 다가가려는 배려다.

극이 너무 길면 따분하고, 한 발 더 나가면 지루한 나머지 눈을 감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적인 인생을 기획한 주체가 주인공답지 않았으니, 그 연극은 1회로 끝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극본 없이 여태껏 끌고 올 수 있었던 건 몇 할, 삶의 진정성에 연유할 것이다. 아잇적부터 가난에 절고 세상에 치였으니까.

언제부터인가, 내 인생의 극본을 쓴다며 발 벗었다. 귀한 발견이었다. 내 인생의 극본은 남이 써 줄 수 없다는 터득은 나를 바꾸기 시작했다. 살아온 대로가 아니었다. 극본 수정도 내 몫이 됐다. 읍내 집에 작은 정원을 가꾼 것은 그래서 획기적인 것이 됐다. 많은 나무들을 키우며 나무의 무애(無碍)한 삶을 내 안에 함께 심었다. 30년을 그렇게 시골서 살다 얼마 전 도심의 아파트로 옮아왔다. 윤택하진 않지만 잘 사는 도시 사람들이 부럽지 않다. 그들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나는 그들에게 없는 걸 가졌다.

그것은 나를 보며 혹 그들이 부러워할지도 모를 지적‧정신의 노작,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나를 잊고 읽고 쓸 때의 삼매경. 이제 나는 내 인생의 극작가, 연출 담당이고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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