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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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숙, 세화중학교 교감·수필가

오늘은 밝은 표정이다.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따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잔소리하는 어른에 대해 편치 않은 감정의 부스러기가 그대로 묻어나기도 했다.

듣자 하니 자신이 희망하는 진로가 부모의 기대와 달라서 잠시 의욕을 잃었던 것 같다. 부모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불안한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책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감수성까지 풍부하여 개성 있는 손 작품도 잘 만들어낸다는데.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했는데 웃음을 되찾아서 다행이다.

중학교는 아이의 생각과 부모의 뜻이 엇갈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부모는 좀 더 안정된 길을 가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방향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면 존중해주는 것은 어떨까.

아무려면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지칠까. 처음부터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서 되는 일이란 세상에 없다. 아이가 힘들어 주저앉을 때 일으켜주는 사람, 그게 부모 아니겠는가.

자식이 말처럼 그리 쉽다면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지 않은가. 나 역시 부모의 뜻대로 잘 자란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자식은 걸음마를 배우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전생의 빚쟁이를 현생에서 자식으로 만난다는 말, 청양고추보다 더 맵싸하다.

요즘 아이들이 겉으론 대차 보인다. 겉이 대찬 만큼 속도 실했으면 좋겠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많은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실패하더라도 그 시간이 결코 맹탕은 아니니 말이다. 성공 못지않게 실패의 경험이 그리 몹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어른들은 알고 있지 않은가. 다져지지 않은 채 성공만을 성급히 좇다 보면 생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 크게 넘어지기도 할 터. 따뜻한 어른의 역할이 필요한 것도 이때다.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도록 같은 편에 서서 용기를 주는 것, 그 이상 값진 선물이 또 있을까.

대나무의 마디처럼 굳고 굵어져서 더욱 굳건해지고, 다시 굳고 굵어져서 굳건해지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마디마디 성장하여 비로소 제 삶이 완성된다. 그것이 공부 아니겠는가. 하니 서두르지 않도록 오래 기다려 주는 게 어른의 몫일 터다.

학창 시절의 나도 부모님의 뜻을 잘 따랐던 건 아니다. 두어 차례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큰 후회 없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살아보니 그렇다. 뜨겁던 날의 열망도, 새롭게 시작하는 낯섦도, 기쁜 날의 설렘도 한 그릇에 담으니 그저 고만고만하다. 맘껏 아이와 웃을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한번 해보라고 널따랗게 멍석 깔아주는 것은 어떨까. 행복했던 시간을 날개 삼아 불행이라는 복병을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 있도록, 온전하게 자신의 시간을 채워갈 수 있도록 기다려보자.

어른의 비움으로 아이의 행복을 채우는 것, 그게 결국은 모두를 채우는 지혜 아닐까.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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