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도(城山島)가 성산반도(城山半島)로 바뀐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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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일출봉의 마을 성산포의 비경과 비사를 찾아서

병구(甁口) 메워 만조에도 드나들다

4·3 당시 터진목 지리적 특성 탓
제주서 가장 많은 학살 피해…

우뭇개 동산 풀밭서 비극적 총살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탐라십경도 ‘성산’을 설명한 글과 그림에서 병구(甁口)를 확인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탐라십경도 ‘성산’을 설명한 글과 그림에서 병구(甁口)를 확인할 수 있다.

▲병구(甁口)를 메워 성산반도(城山半島)로 탈바꿈한 성산도(城山島)

성산리는 제주 섬의 최동단 해안에 위치한 성산반도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 甁口(병구)라 불리던 ‘터진목’이 제주 본섬과 이어지기 전까지는 섬이었다. 

1702년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제주 섬을 순력하며 제작한 ‘탐라순력도’, 화공 김남길이 그린 ‘성산관일(城山觀日)’에도 마을의 모습은 볼 수 없고, 지금 마을이 있는 곳에 봉천수의 모습이 그림에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인 아버지 임진에게 자신의 과거급제를 알리려 제주에 온 임제는 섬을 여행을 하며 성산도(城山島)의 이야기를 《남명소승》이라는 글에 남겼고, 제주 목사를 지낸 이익태의《탐라십경도》, 탐라순력도를 제작한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기록에 병구(甁口)라는 가느다란 둔덕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웃 마을인 고성리와 섬인 성산도 사이인 병구는 간조 시는 둔덕이 드러나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고 만조 시에는 물에 잠겨서 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다. 

성산도(城山島)였던 섬이 병구라 불리던 가느다란 둔덕, 터진목이 메워져 성산반도(城山半島)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곳이 ‘터진목’이다. 

▲제주4·3을 온몸으로 맞은 성산도

제주는 제주4·3사건에 그 시절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인, 3만이 목숨을 잃는다. 

성산은 4·3사건으로 제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학살당한 곳이다. 

그 이유는 지리적인 특성상 터진목으로 이어진 섬 속의 섬이었기 때문이다. 

제주4·3 당시, 성산리는 이곳 터진목 길목만 막아버리면 섬 전체가 바다로 둘러싸여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마을은 1948년 4·3 발발 초기에 4·3을 일으킨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성산국민학교에 ‘서청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군인들은 성산포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목인 터진목을 차단하고, 이 터진목에서 성산면 관내 마을 주민들을 공개적으로 총살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성산면 관내 주민들을 붙잡아 감저(고구마) 창고에 수감시켜 놓고 혹독한 고문과 취조 끝에 터진목으로 끌고 가 즉결 총살했다. 

서청특별중대의 존재는 성산면·구좌면 지역 주민들에게 악몽이었다. 

그 곳에 한 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27일부터 1949년 2월 27일까지 약 4개월 동안 30여 차례 이상 터진목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10~20명씩, 30~40명씩 집단으로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고, 감저 창고에서 취조당하다 1~2명씩 끌려나가 총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터진목에서 희생된 성산면과 구좌면 주민 수는 210명에 달한다. 

성산지역 4·3사건 전체 희생자 450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00여 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이다. 

62년 후인 2010년 11월 15일에 이르러서야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성산지역 445명의 넋을 위로하는 ‘성산읍 4·3희생자 위령비 제막식 및 추모위령제’가 올려졌다. 

터진목 4·3 유적지는 일출봉 일제 갱도진지와 더불어 제주 다크투어리즘의 중요한 코스 가운데 하나다. 

성산일출봉의 북서쪽 능선에 있는 우뭇개 동산.
성산일출봉의 북서쪽 능선에 있는 우뭇개 동산.

▲우뭇개 동산

성산일출봉의 북서쪽 능선, 매표소 맞은편에는 ‘우뭇개 동산’이라 불리는 풀밭이 있다. 

이 너른 풀밭에서 성산포 인근 오조리 주민 20여 명이 이른바 ‘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서북청년단’에게 집단 총살을 당한다. 

해방 직후 일본군은 성산에 갱도진지를 만들 때, 사용했던 다이너마이트를 버리고 간다. 주민들은 다이너마이트를 어업용으로 사용을 했다. 

오조리 주민들은 마을 스스로 민보단을 조직하여 마을 경비에 나섰는데, 마을을 지킬 목적으로 초소에 다이너마이트를 두었다. 이 사실이 서북청년단에 알려지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서북청년단은 이 다이너마이트로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며 1948년 12월 29일에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하고 있던 오조리 마을 주민들을 공회당에 모이게 하고 모든 집을 수색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고문 취조를 받다가 며칠 뒤인 1949년 1월 2일 우뭇개 동산에서 서북청년단에게 집단 총살을 당한다. 저들은 이 비극적인 총살 장면을 성산리 마을 유지들은 모두 나오라고 해서 구경을 시켰다고 한다. 

글·사진=고수향 세계자연유산해설사 겸 ㈔질토래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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