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학문에 힘쓰고 방대한 저서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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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시대의 유종(儒宗) 현덕문
현경호, 제주중학원 개설, 초대 교장·제주도민전 의장단 추대
현계평, 연주현씨 제주도총친족회 창립…회장·부회장 역임
현길언, 제주대·한양대 교수 역임…제주 역사 조명한 소설가
현대원, 서강대 교수…박근혜 정부 당시 미래전략수석비서관
현덕문, 노형 출생 문인…사례집설(四禮集說)·화동잡지(華東雜誌) 등 30여 권 저술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대성전 전경. 향교는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현덕문의 증조부 현광보는 제주향교의 훈장을 지냈다.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대성전 전경. 향교는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현덕문의 증조부 현광보는 제주향교의 훈장을 지냈다.

▲현경호玄景昊:1894(고종31)~1948(분단시대), 호는 우계(又溪), 초명은 현인종(玄仁宗), 본관은 연주, 제주향교의 영수인 직원(直員)이던 현승호(玄升圭)의 장남, 제주읍 노형리 월랑동에서 태어났다. 오랜 동안(1936~1945) 제주향교의 직원(直員)을 역임, 1945년 유림을 규합하여 향교 경내에 제주중학원(濟州中學院)을 개설, 1946년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7년에는 제주도민전 의장단(議長團)에 추대되었다. 1947년 2월 17일 제주도 3·1절기념준비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이날 읍내 김두훈(金斗壎) 댁에 인사들은 준비위원장에 안세훈(安世勳), 부위원장에 현경호와 오창흔(吳昶欣)을 추대한 후 위원 28명을 선정하였다. 1919년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해 2학년 때 그만두고, 1924년 향리에 의성학숙(義成學塾) 개설하여 노력했다. 이에 앞서 그는 1919년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을 수료하고 1924년 2월 노형동에 의성학숙(義成學塾)이 개설될 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주중학교 교정 모퉁이에 있는 현경호(玄景昊) 송덕비.
제주중학교 교정 모퉁이에 있는 현경호(玄景昊) 송덕비.

▲현계평玄癸平:1903(광무7)~1987, 문인, 본관 연주, 호는 양암(陽菴), 제주시 이도동(서-과양)에 태어나 평생 살면서 의병참모 김석윤(金錫允)을 사사하며 한시를 배웠다. 길성운(吉聖運) 도백 당시 도백부인이 현(玄)씨로 실향민이란 점을 이해하여 현계평은 먼저 연주현씨 제주도총친족회를 창립하여 초대 부회장, 이어 제2대-제5대까지 회장으로 역임하였다. 현씨의 본관은 평북 영변(寧邊)이다. 전 청와대 미래경제부 수석비서관 현대원(玄大原)(1964~)의 조부.

▲현길언玄吉彦:1939~2020, 남원읍 수망리 태생. 제주대학교․한양대학교 교수 역임. 
현대문학상, 녹색문학상 수상. 작품집 ‘유리벽’, ‘누가 그 섬에 갈 수 없을까!’와 장편 ‘숲의 왕국’을 비롯해 ‘문학과 성경’, ‘인류역사와 인간탐구의 대서사’, ‘국가권력과 역사왜곡’ 등의 저서가 있다.

현길언의 단편소설집 ‘유리 벽’. (문학과지성사)
현길언의 단편소설집 ‘유리 벽’. (문학과지성사)

▲현대원玄大原:1964~현재. 제주일고,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와 대학원 졸업.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텔레커뮤니케이션정책학으로 언론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교수,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미래전략수석비서관. 그는 한국 정보통신기술(ICT)과 산업의 융합을 강조해온 대표적인 디지털 미디어 전문가답게 고향 제주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학자이면서도 시대의 흐름과 실무에 밝은 그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성공의 문을 열어주는 게 창조경제의 핵심”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하고 “제주를 스마트 관광이 가능한 곳으로 만들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창업 붐이 일고,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져 신바람 나는 새로운 경제엔진이 작동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덕문玄德聞:1817(순조17)~?, 문인, 자는 백승(伯升), 호는 월곡(月谷), 본관은 연주, 제주시 노형동 월랑촌에서 중군 현광보(玄光輔)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평생 학문에 힘써 한 시대의 유종(儒宗)으로 추앙을 받았다. 과거(科擧)의 행운을 얻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뒷날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도 월곡(月谷)의 저술을 보고 칭송한 바 있다. 한편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이 그의 방대한 저서에 대해 평하기를 “30여 권의 저술은 제주에서 처음 있는 일로서 나는 모든 저서를 읽지 못했으나 ‘탐라기략’을 보건대 다른 저서도 미완의 상태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1856년(철종7) 제주판관 홍경섭(洪敬燮)의 지시로 ’귤림서원지(橘林書院誌)‘를 수찬, 1868년(고종5) ‘유가선문(儒家選文)’28권을 편저하여 당시의 신구 목사인 이후선(李後善)과 조희순(趙羲純)의 서문을 게재하였다. 기타 사례집설(四禮集說)·화동잡지(華東雜誌)·탐라기략(耽羅紀畧)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진재(震齋) 이응호(李膺鎬)는 ‘중군공전(中軍公傳)’을 지어 그의 인품 됨을 소개하였다. 참판 이병관(李柄觀)의 찬양문도 있다. 지금 책이 전하지 않는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문헌이 존재하던 것이 1948년 4·3사건으로 전소된 것이 아닌가 보아진다. 월곡의 증조부 현광보(玄光輔)(1739~1826)는 정희량(鄭希良)의 문하생이며 벼슬이 방어중군으로 학문을 닦으며 병술을 겸비, 제주향교 훈장을 거쳐 1771년(영조47) ‘우암유허비(尤庵遺墟碑)’를 적소였던 산지동에 세웠다.(후일 오현단으로 옮김). 또 현광보는 1780년 김영수(金永綏)목사의 지시로 공해(公廨)(관청)를 중수할 때 도감으로 뽑혀 이를 완성했으며 양남훈(梁南訓)·송달홍(宋達弘)과 깊이 교유하였다. 월곡(月谷)도 증조부의 유업을 받들어 이를 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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