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너머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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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미 수필가

창 너머에 풍경이 창가로 끌어당긴다. 네 폭의 거실 창틀에 하늘이 들어와 있다. 되직한 물감으로 붓질이 버거운 날인가, 훌훌 어반 스케치로 초대전을 여는 갤러리가 무색하다. 아래쪽 창에 초록 숲은 끝내 배경 화면에 새겨 놓았다. 주황색 건물 지붕이 외국 여행지의 골목 어귀쯤을 소환하니 아직 만기일이 아득한 적금을 깰까, 역마살 부추긴다.

온통 젖어버린 세상으로 나설 일이 없는 비 내리는 오전, 안온한 기운을 타고 음악을 선곡하고 커피를 드립 한다. 나만을 위해 예약해 둔 정찬처럼. 창 너머 건너오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는, 삶의 현장으로 마음보다 더 바쁜 와이퍼를 움직이며 떠나는 길이 아닌가. 우산에 의지해서 서둘러 걷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바람이 우산을 흔들어 대는 날에는 안간힘을 써야만 한다. 삶은 매 순간을 지탱하기에 급급하다 겨우 소소한 안위를 얻는다. 현실에 치이지 않은 지금, 감사함이 우선이어야 하리라.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휘청거릴 땐,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이 일시에 동요한다. 어느 쪽으로도 비켜설 수 없는 나무들이 안쓰럽다. 동정의 기류가 빠르게 전달되었을까. 바람이 다급하게 몰아붙이는 건만은 아니다. 나무들이 평정이다. 때를 맞추어 걸리적거리던 마음도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비를 피하고 숨어 있던 새가 푸드덕 날갯짓하며 비를 털어낸다. 젖은 나뭇가지를 외면하고, 돌담 위에 사뿐히 하강하는 새들에게서 난 자리 든 자리를 구분하는 지혜를 읽는다. 본능적으로 살아갈 방도를 찾는 건, 사람이나 새들이나 매한가지다. 비가 그친다는 징후는 소란스러운 새들이 알려 준다. 마치 아이들을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브런치 카페로 모여든 젊은 엄마들의 망중한처럼 수다스럽다.

새벽 창 너머로 덜 깬 잠을 거두는 찬 공기를 호흡한다. 창을 타고 아빠 새가 저음으로 찌르르 찌르르 울더니, 쪼로롱, 삐리리 일제히 기상을 하는 새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때, 새들도 아빠의 권위가 살아있고 새끼들은 순종하는구나, 서열이나 질서는 존재하는 것들에겐 신께서 본능적으로 부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제 도리를 다하는 것이 근본이 되어야겠지. 점점 사위어 가는 삶은 체념하는 일들이 늘어만 가는데, 새들에게서 분주한 아침이 건너와 덩달아 생기 돋워주는 시작 점이다. 와이파이 공유기가 없어도 창 너머로 나와 새들이 소통한다.

저녁 창가로 무심코 시선을 두는 날이 있었다. 싱숭거리지도 않았고, 낭만을 즐기자고 부러 시간을 쪼개지도 않았다. 무심이 통했다. 주저 없이 쏟아지는 말은 와! 한마디였다. 뜨겁게, 뜨겁게 남김없이 사랑을 태우는 저녁노을은 열애 중이다. 하직하는 순간까지 원도 한도 없는 열정을 타전한다. 클라이맥스를 찍고 흔적도 없이 마감한다.

인생 마지막, 노을처럼 저물 수 있기를 사람은 바라지만, 그건 신의 영역이 아닌가. 팔순이어도 꼿꼿한 육신에 감탄했던 아래층 노인이 얼마 전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걸 보았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건, 스러지는 육신을 막을 길이 없다는 나약함이다. 노인을 위해, 더는 무너지지 않고 시나브로 생을 마감하게 해 달라는 화살기도를 바치며, 내 노년의 모습이 아니길 바라는 간절함도 보태진다.

지금, 창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최적의 해상도를 담아낸다. 벽을 보랴, 창을 보랴. 당연히 창 너머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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