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농업학교서 제1차 항일 활동 전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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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학생 항일운동가 현도선

현도선, 학교 황민화(皇民化)에 반발…독립유공 건국포장 추서
현문숙, 재일교포…공직·사업하며 탐라기행(耽羅紀行) 발행 계기 마련
현병화, 김영관 전 도지사 부인…제주 걸스카웃 적극 후원
현봉의, 거로 출신 무신…전남 영광 다경포(多慶浦) 수군만호 재임
제주농업학교 수업 장면. 현도선이 학생으로 재학 당시 전남 광주에서는 항일 학생 운동이 있었고 1년 4개월여 만에 제주에서도 운동이 전개됐다.
제주농업학교 수업 장면. 현도선이 학생으로 재학 당시 전남 광주에서는 항일 학생 운동이 있었고 1년 4개월여 만에 제주에서도 운동이 전개됐다.

▲현도선玄道善:1911(일제강점기)~1948,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 활동. 본관은 연주, 현귀석(玄貴錫)의 장남, 구좌읍 하도리<별방>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3월 9일 체포돼 1932년 대구복심법원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건국포장을 추서. 학교의 황민화(皇民化)에 대한 반항심의 발로였다. 

그는 조국이 광복되고 1948년 제주도 4·3 사건 일어난 후 동 5월 29일 성산읍 시흥리 ‘한-마루’란 곳에서 암살됐다. 1931년 3월 7일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그는 양치삼(梁致三)(대림)·홍계표(洪季杓)(귀덕)·신창진(愼昌珍)(월정)·양두옥(梁斗玉)(신창)·고운석(高雲石)(조수)·김두진(金斗珍)(신창)·신찬익(申璨翊)(대림) 등 동기생들과 함께 일본인 교장 스기사키<杉崎勝藏>에 대한 배척 운동을 전개했다. 

졸업식 직후에 교장을 배척하기로 결의하고 폭력에 의한 실력 행사를 단행했다.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거세게 폭발해 1930년 한 해는 전국적으로 학생 운동이 파급됐다. 제주도에는 제주공립농업학교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학교의 재학생들도 어수선하더니 1931년 3월 졸업 사정회에서 졸업 예정자 김원요(金源堯)(21, 조천)를 제적처리하고 신창진(愼昌珍)(18, 월정)과 양두옥(梁斗玉)(18, 신창)에게 유급조치를 내렸다. 김원요·양두옥·신창진 등은 3학년이 된 후 평소 소위 일본 천황의 칙어(勅語)를 학교 의식 때에 봉송(奉誦)을 해도 전혀 묵도(默禱)를 하지 않아 교사들로부터 주목받던 터였다. 

동년 3월 7일 졸업식 날에 김원요는 교무실에 들어가 담임인 일본인 교사 야마가와<山川助夫>에게 부당한 조치에 강력히 저항했다. 담임은 경찰에게 알리니 제주경찰서에 수감해 버렸다. 유급당한 동창 신창진과 양두옥은 동월 9일 교장실로 찾아가 스기사키<杉崎勝藏>에게 부당함을 항변하고 일본인 교사 모리다<森田親厚>에게 일격을 가했다. 따라서 홍계표(洪季杓)(21, 귀덕)는 교사 다카하시<高橋>와 야마가와<山川>에게 학우 김원요의 수감을 따질 때  홍계표가 큰 소리로 외치자 이를 신호로 고태리(高泰利)(20, 귀덕), 양두옥, 고운석(高雲石)(23, 조수), 현도선(玄道善)(21, 하도), 김두진(金斗珍)(20, 두모), 신찬익(申璨翊)(20, 대림) 등은 일제히 교무실로 들어가 모든 공공기물을 던지고, 또 양치삼(梁致三)(21, 대림) 등은 교장실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박살내었다.

시바 료타로의 탐라기행 단행본.
시바 료타로의 탐라기행 단행본.

▲현문숙玄文叔:1922(일제강점기)~1998. 호는 정인(靖人), 서귀포시 호근리<호근-머들>에서 현무춘(玄戊春)과 어머니 김미청(金美靑)과의 4남 2녀 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어버이를 따라 도일해 초·중등학교를 마쳐 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에 다니다가 경도제국(京都帝國)대학 교양학부 철학과로 들어갔다. 졸업 후에 공무원채용시험에 합격, ‘오사카지방법원’에서 판임관(判任官) 관리를 하기도 했다. 

이후 오사카에서 부인 문순애(文順愛)(제주 성안 출신)와 함께 서도보식점(西島寶飾店)과 서도산업주식회사, 서도(西島)모다풀 등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든든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그는 법과·영문과·철학과를 두루 거쳐 지식이 풍부할 뿐 아니라 종교(기독교와 불교 등) 문제 또한 깊이 섭렵(涉獵)했다. 

한편 제주의 친족회에 장학금 5000만원을 쾌척(快擲)하여 장학회를 마련했다. 

전일본의 존경하는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와 절친한 부부는 그를 제주로 안내해 이 곳 풍물과 역사를 일본의 최대 신문인 아사히<朝日>신문에 기고하도록 해서 이 글을 <탐라기행>이란 단행본으로 발간하도록 했다. 이때 동행한 교포 학자가 강재언(姜在彦)(삼양 태생)교수였다. 강교수는 화원대의 역사학자이다. 

한편 현문숙은 경도대학 총동창회장으로서 또 부인 문여사는 주부화가로 회원전을 열며 만년을 보낸다. 

일본 역사소설의 대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부부와 서귀포 출신 재일교포 현문숙(玄文叔) 부부, 일본 ‘하나소노’(花園)대학 역사에 있는 강재언(姜在彦)(삼양 출신)교수 등과 함께 제주 섬에 채류하면서 시바료타로로 하여금 제주를 소재로 한 ‘가이도오-유쿠’<街道를 달린다.>라는 탐라기행(耽羅紀行) 단행본을 발행하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현병화玄苪花(여):생몰년 미상, 제주도지사 김영관(金榮寬) 제독(提督)의 부인, 1962년 11월 12일 현(玄)여사는 산부인과 의사인 장시영(張時英)씨의 부인 김명신(金明信)여사를 초빙, 제주도 걸스카웃 운동에 협조를 요청했다. 

김영관(金榮寬) 도백의 회고담(懷古談)에 “부인은 1984년 7월 서울에서 제주(濟州)출신 걸스카웃 대원과 지도자를 지낸 사람들을 중심으로 초대 회장을 맡아 매년 후원금을 지원하는 줄 안다. 내 아내 현병화는 이런 일이 있기 이전부터 제주도로부터 명예도민(名譽道民)으로 있었다. 걸스카웃 재경(在京)후원회 회원들은 제주도민회를 떠받치는 기둥들이다.”라고 밝혔다.

▲현봉의玄奉義:1552(명종7)~1612(광해군4), 무신. 본관 연주, 제주목 중면 거로촌에서 현한공(玄漢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해 외직으로 전라도 영광(靈光)군의 다경포(多慶浦) 수군만호로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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