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화풍(地水火風)이 만든 영주십경(瀛州十景)의 제1경, 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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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마 폭발로 빚어진 수성화산체
성산반도(城山半島) 다시 성산도(城山島)로 바꿔야…

일제 전쟁물자 위해 터진목 메우고
4·3 때는 길목 막혀 학살 피해…
날씨가 맑은 날, 오조리 바다못에는 대수산봉, 한라산, 다랑쉬오름, 말미오름, 식산봉이 비쳐 보인다.
날씨가 맑은 날, 오조리 바다못에는 대수산봉, 한라산, 다랑쉬오름, 말미오름, 식산봉이 비쳐 보인다.

▲병구(甁口)인 터진목을 복원해 다시 성산도(城山島)로

 5000여 년 전, 낮은 수심의 해저에서 마그마가 솟으니 무한정의 바닷물(水)이 불(火)을 다스려 성산을 지었다. 5000년 동안 바람(風)이 갈무리한 수성화산체가 성산이다. 

깊은 수심의 해저에서 마그마가 폭발하면 산의 높이가 비교적 낮은(비고가 100m 이내) 응회환(凝灰環)이 되고, 낮은 수심의 해저에서 마그마가 폭발하면 산의 높이가 비교적 높은(비고 100m 이상) 응회구(凝灰丘)가 된다. 제주의 수성화산체 중 대표적인 응회환이 수월봉(표고 77m)이고, 성산일출봉(표고 180m)은 대표적인 응회구다. 

성산은 한라산과 바다를 사이에 둔 산이었고, 제주 본섬과 떨어진 섬이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풍화작용으로 성(城)의 모습만 남기고 성산에서 떨어져 나온 자갈과 모래를 파도가 바람의 힘을 빌어 본섬과 이어진 길을 만드니 신양리 해안사구로 이어지는 광치기해변이다. 바람과 파도는 본섬과 이어진 육계사주(陸繫砂洲)를 만들며, 만조 시간 동해에서 밀려온 바닷물이 성산과 붙은 자연포구 수마포를 넘어 꼬불꼬불한 오조리 해안으로 들 수 있게 물길을 내줬고, 간조 시간에는 오조리포구의 바닷물이 수마포를 거쳐 동해로 날 수 있게 물길을 두었다. 그 들고 나는 물길의 이름이 조선시대에 성산을 이야기한 탐라십경도에 병(甁)의 입(口)이라 하여 병구(甁口)라 부르다가, 근래에 들어 터진목이라고 부른다. 

제주판 모세의 기적, 성산은 1930년대 이전에는 하루에 두 번 간조 시간에 터진목을 걸어서 성산에 들 수가 있었고, 만조 시간에는 배를 타고 성산에 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1920년대 초부터 성산포 항구 개발이 추진되면서 성산리가 성산면의 중심으로 발전을 한다. 성산포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정의현 고성리에 속한 포구촌에 불과했다. 1872년 제작된 『제주삼읍전도』에 처음으로 ‘성산리’가 나타난다. 성산리는 19세기에 들어 고성리에서 독립된 마을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와 가장 가까운 성산에 전쟁 보급물자를 만들어 일본 본토로 갖고 가려고 1930년대 초반부터 대규모의 통조림공장, 소라껍데기를 이용한 단추공장, 조제옥도(요오드) 공장 시설을 만들었다. 그 무렵 일제도 제주 본섬에 오가는 것이 불편했지만, 지역주민들도 간조 시간에만 본섬에 드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이에 일제와 지역주민들은 터진목을 메워 물길을 막아 본섬을 오가는 길을 만든다. 2004년 9월에 성산리에서 발간된 ‘성산포지 해뜨는 마을(미술출판 파피루스)’과 2021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와 ㈔제주역사문화진흥원이 공동 발행한 ‘유네스코 제주 세계자연유산마을 성산리(한그루)’ 책에도 터진목이 정확히 언제 메워져 성산도(城山島)가 성산반도(城山半島)가 됐다는 연도 기록은 없다. 성산포지 해뜨는 마을의 책에는 ‘연륙교라는 별칭이 붙여졌던 터진목 다리’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길이 대형 태풍 때 해일 현상으로 파도에 유실되자 성산반도는 다시 성산도가 돼버렸다. 

성산일출봉 정상에서는 한라산과 다랑쉬오름, 지미봉과 터진목을 볼 수 있다.
성산일출봉 정상에서는 한라산과 다랑쉬오름, 지미봉과 터진목을 볼 수 있다.

이로써 주민들은 한동안 썰물 때가 돼야 본섬에 드나들 수 있는 등, 많은 불편이 따랐다고 한다. 또한, 이제는 고인이 된 주민 강창송 씨에 의하면 파도의 힘으로 무너진 부분에 두꺼운 철망을 덮고 굵은 자갈을 담아 촘촘하게 메워 길을 임시 가설해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축담을 쌓고 흙과 잡석으로 매운 다음 폭 30여m에 이르는 튼튼한 길을 만들고, 그 옆에 60여m의 기다란 방호벽을 쌓았다. 그 방호벽은 지금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성산리의 한(恨)의 역사는 조선시대 병구라 불렸던 터진목에서 시작된다. 일제와 지역주민들은 이 터진목을 메워 본 섬을 자유로이 드나들었고,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이 확실해지자 이 길을 드나들며 일본 본토 사수를 목적으로 성산일출봉 동남쪽 해안에 18개의 갱도진지를 만들었다. 연합군 함대가 나타나면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자살특공병기를 숨겨뒀기 때문이다. 

성산리는 터진목 길목만 막을 때 섬 전체가 바다로 둘러싸여 오갈 수 없는 곳이다. 1948년 제주 4·3이 발발하자 이 성산리에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서청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성산리의 아픔이 시작된다. 이 터진목에서 200여 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 성산리는 땅 면적 대비 제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곳이다. 성산은 섬 속의 섬, 우도의 면적(6.18㎢)의 5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1.224㎢)이다. 

필자는 성산의 비경과 비사의 이야기를 하며 제주 섬의 신화와 설화, 역사와 문화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만든 자연의 역사 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스스로(自) 그러한(然) 자연(自然), 지수화풍(地水火風)은 성산을 만들며 다 생각이 있어 물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일제와 지역주민들은 그 물길을 막아 자연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섬에 사는 사람들이 지은 신화와 설화, 역사와 문화는 지수화풍이 만든 자연의 역사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터진목을 복원해 물길을 열어 그 자연의 물길을 풀어줘야 한다. 

고성리에서 성산리로 드는 가느다란 목, 터진목에 무지개다리를 놓아 터진목을 열어 동해에서 밀려온 바닷물이 오조리포구에 들고 낢이 자유롭게 하자. 무지개다리 위에서 눈 아래 펼쳐지는 광치기해변을 바라보게 하고, 오조리 바다못을 바라보게 하자. 새로운 비경이 펼쳐질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성산은 5000년 전 낮은 수심의 해저에서 폭발한 수성화산체이고,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응회구다. 성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물(水)이 불(火)을 다스렸고, 5000년 동안 바람(風)이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성산일출봉응회구’는 2007년도에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핵심구역이고, 2010년 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 무지개다리에 성산은 제주 본섬과 떨어진 섬이었음을 알리자. 

성산일출봉 정상에서 광치기해변과 오조리 바다못을 바라보면 ‘가느다란 목 터진목이 열리면 자연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고수향 ㈔질토래비 전문위원·세계자연유산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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