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설줄 모르는 제주인들의 교육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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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일출봉 마을 성산포의 교육과 일제의 교육정책

유물 훼손한 일제…교육으로 억압
윤원구(당시 제주군수), 도민 위한 의신학교 계 설립

성산초, 한때 피란민 임시수용소
동남초, 골짜기 ‘동류암’서 유래
탐라순력도 성산관일(成山觀日)은 현 마을이 들어선 자리에 봉천수의 모습 등 옛 성산과 주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탐라순력도 성산관일(成山觀日)은 현 마을이 들어선 자리에 봉천수의 모습 등 옛 성산과 주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에 의해 사라진 성산(수산)진성 성담의 역사적 의미

섬 속의 섬이었던 성산포는 마을 형성이 19세기에 와서 이뤄졌다. 1702년 그려진 탐라순력도 성산관일(城山觀日)에는 현 마을이 들어선 자리에 봉천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성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18년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에 온 사람들은 오정개·터진목·수메밋·우묵개·통밧알 등에 취락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른다. 탐라순력도 성산관일은 옛 성산과 주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사실화이다. 성산의 서쪽 해안의 오정개 언덕에서 동안의 수메밋에 이르는 산 아래에 둘러싸인 성벽은 임진왜란 시인 1597년경 이경록 목사의 주도로 쌓은 성산(수산)진성의 흔적이다. 

그러나 제주읍성 성담이 산지항 구축에 매워졌듯, 애석하게도 당시의 성담들은 일제에 의해 터진목(병구:甁口)을 메우는 데에 사용되었다. 1910년 발효된 ‘읍성철폐령’의 후속 조치이리라. 일제는 왜 당시에도 건설 가능한 다리 대신에 조선의 역사적 유물인 성담들을 터진목을 메우는데 사용하였을까. 일본 내의 역사적 유물도 그렇게 처리하였을까? 일제의 교육제도에서도 그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흔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일제의 통치방식을 무단통치라 하고, 그 이후를 문화통치라 한다. 일제는 일본인 자녀들만의 교육을 위해 제주시(1911년), 서귀포(1917년), 성산포(1918년), 추자도(1919년), 이후 한림과 모슬포 등 6개 지역에 학교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19년 성산포에 거주하는 일본인 10여 호 자녀 20여 명을 위해 ‘성산포공립심상소학교’등을 개교했다. 1927년에는 성산포 거주 일본인이 30호 108명에 이를 만큼 일제는 해안 중심정책을 펴기도 했다. 1939년 기록에 의하면 ‘성산포동공립심상고등소학교’의 수업연한은 심상과 6년, 고등과 2년이었다.

탐라순력도 성산관일(成山觀日), 1702년(숙종 28) 7월 13일 성산일출봉에서 해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탐라순력도 성산관일(成山觀日), 1702년(숙종 28) 7월 13일 성산일출봉에서 해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제주도(島) 1면1교제와 개량서당

제주 근대학교의 시초는 1907년 개교한 제주공립보통학교(제주북교의 전신)와 사립의신학교(제주제일중과 제주고의 전신)이다. 당시 제주군수인 윤원구는 신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이 많은 학생은 사립의신학교로, 연령이 적은 학생은 제주공립보통학교로 입학시켰다. 국가의 흥망이 교육에 달렸다는 의지로 학교 설립에 적극 매달린 윤원구 목사는 ‘의신학교 계’를 설립하였다. 제주도 5개면 88개 마을 이장들이 관덕정 앞에 모여 의연금 모금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다. 교사(校舍)는 제주목의 객사로 사용하던 영주관(현 제주북초 주변)이었다.

1905년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일제는 1910년 한일병탄을 하고, 아울러 조선인의 고등교육 억제와 개량서당을 탄압하려 하급관리와 직업인 양성 중심의 교육정책을 담은 조선교육령을 4차에 걸쳐 공포했다. 당시 제주에는 여말선초부터 이어져 온 서당으로 한학 중심의 전통서당과 근대교육 중심의 개량서당이 혼재되어 있었다. 

제주도 자료에 의하면 1926년 제도권 학교인 보통학교 학생 수는 6000여 명이고, 전통서당과 개량서당은 2만2000명이며, 1936년에는 개량서당 69개교와 전통서당 90개교가 있었다. 개량서당(共同書堂, 里民書堂)은 사숙·의숙·학당·학사 등으로 불리며, 한문서당인 재래식 서당과 보통학교의 명칭과 구별되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1군1교제로 제주보통학교(1907년), 정의보통학교(1909:성읍), 1911년 대정보통학교(1911:보성) 3개의 보통학교가 있었다.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 시기를 맞아 1군1교제에서 1면1교제로 전환함에 따라, 1920년 서귀보통학교, 1922년 조천보통학교, 1923년에는 명월리 구우공립보통학교·애월 신우보통학교·김녕 구좌보통학교·성산보통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중등학교로는 사립의신학교(1907:공립제주농림학교 전신)와 현 서귀포중학교 부지에 설립된 제주도공립농업실수학교(1936:서귀실수학교) 2개교뿐이었다. 

일제의 1면1교제 정책의 일환으로 고성리에서 1923년 성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동남초등학교.
일제의 1면1교제 정책의 일환으로 고성리에서 1923년 성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동남초등학교.

▲성산초등학교와 동남초등학교의 기원

성산포에서는 설촌 이후 향사에 개량서당인 일출사숙이 개설되어 기초교육과 야학이 실시되고 있었다. 고성리에 위치했던 ‘성산서공립국민학교’에 다니던 성산포 출신의 어린이들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성산포에 들어선 ‘성산동공립국민학교’로 대부분 전학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성산포 어린이들은 한국인이란 이유로 고성리에 있는 지금의 동남초등학교인 성산포서공립국민학교에 다녀야 했다. 

다만 심상소학교를 마친 일본인 자녀들이 본국의 상급학교로 진학하였기 때문에, 한국인 학생 약간이 학교에 기부금을 내는 조건으로 고등과 빈자리에 한해 한때 다니기도 했다. 한편 한국전쟁 초기에는 밀려오는 피란민을 수용하는 임시수용소가 성산포에 설립되기도 했다. 성산포에서 나고 자란 한림화 소설가에 의하면 임시수용소는 예전의 성산초등학교 자리로, 4·3 때 민간인 수용소였던 곳이다. 이후 피란민들은 민가로 분산 수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대지가 넓은 한림화 소설가의 집에는 여러 피란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일제의 1면1교제 정책의 일환으로 고성리에서 1923년 성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동남초등학교는 1939년 성산포서공립심상소학교로, 1957년 동남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지역에서는 학교 근처의 골짜기의 이름인 동류암(東流巖)과 유사음인 ‘동남’을 따서 학교 명칭을 동남국민학교로 개칭했다 전한다. 

1951년에 강봉선씨의 임야 1만7000평 기부로 개교한 성산수산고등학교는 2008년에 인문계 학급을 두어 교명이 성산고등학교로 변경됐다.
1951년에 강봉선씨의 임야 1만7000평 기부로 개교한 성산수산고등학교는 2008년에 인문계 학급을 두어 교명이 성산고등학교로 변경됐다.

▲성산수산중·고등학교 기원

어족자원이 풍부한 성산포 지역에서는 해방 직후 학교설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미군정기인 1947년 3월에 강습소 형식인 성산중학원이 설립되고,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9월에 성산수산중학교의 설립인가가 났다. 그해 11월에는 공립수산초급중학교라는 교명으로 바닷가에 인접한 고성리 구치소(舊治所:성산읍 고성리 300)에서 개교하고, 1950년 4월에 4년제 성산수산중학교로 개편되었다. 이어 1951년 8월에는 교육법 개정에 따라 3년제 성산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고, 뒤이어 같은 해 11월에 성산수산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당시 강봉선씨가 임야 1만1700평을 기부하여 개교한 성산수산고등학교는 2000년 제주관광해양고로 교명 변경하고, 특히 2008년 3월부터 일부 인문계 학급을 두면서 성산고등학교로 교명 변경하여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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