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잘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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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농업인·수필가)

성적표가 나왔다. 일 년 농사일에 대한 판결문이자, 식구(食口)들 살림살이와 일용할 양식 가늠할 보상증서다.

농사 갈무리 무렵인 초겨울 저녁. 모처럼 온 가족 둘러앉아 성적표 펼칠 때, 농부의 검게 탄 가슴 뛰고, 갈퀴손에선 진땀이 난다. 가족의 시선이 농부의 얼굴로 모인다. 환하게 펴질까, 일그러져 찡그릴까. 예상대로 편치 않다. 모두 말을 잊는다.

농사일이 언제는 쉬웠을까마는, 올해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힘들었다.

아열대 지방의 스콜처럼 시도 때도 없이 국지성 호우가 쏟아졌고, 비 그친 다음 이어지는 폭염으로 대지는 숨이 턱턱 막혔다. 비 너무 내려 걱정, 비 안 와 가물어서 걱정. 나막신과 우산 파는 두 아들 둔 딱한 어머니처럼,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손 놓고 나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라거늘. 게으름 피워 밭에 가는 발걸음 소리가 뜸하면, 그해 농사는 기대를 접어야 한다.

그렇지만,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농사일이다. 농사는 하늘이 일곱 몫이고, 농부가 세 몫으로 짓는다고 했다. 아무리 애면글면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십상이다.

올해는 하늘이 무심했다. 이상 기후로 인해서 대한민국 농사 대부분 죽을 쑤었다.

시장에 공급이 달리고, 품질이 나쁘다 보니, 농산물 가격이 폭등해 소비자들 지갑열기 부담스럽다. 천정부지 오른 농약, 비료, 인건비에 치여, 농부들 주머니 역시 찬바람 가득하다.

감귤농사도 별 수 없었다. 감귤값 사상 최고라고 호들갑이지만, 낙과(落果) 심하다 보니 반 타작밖에 안 되는 나무들 태반이고, 그마저도 상품보다는 크거나 작은 비상품이 많아 수확량이 말이 아니다. 이쯤에서, 농사일을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모아둔 돈도 변변치 않은데, 먹고 살 수나 있을까. 대놓고 말 못하는 농부의 고뇌가, 싸락눈처럼 내려앉는 밤이 깊어 간다.

각설(却說)하고.

부산 엑스포 개최지 선정 기대로, 촌부(村夫)까지도 잠을 설쳤다.

선진국으로서의 품격 말고도, 350만 시민도 간당간당한 대한민국 제2도시 부산의 괄목할 만한 발전 위해서 유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더구나 대통령과 영부인이 엑스포 유치를 위한다며 뻔질나게 외국을 순방했고, 투표 전날만 해도 언론들이 박빙의 차이라고 설레발을 쳐서, 기대가 더 컸다.

그런데 대참사 수준의 참패가, 대한민국의 새벽을 덮쳤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119대 29. 그런데도 정부와 보수 언론들은, 사우디 왕세자와 오일머니 때문이란다. 더욱이 나름대로 잘 싸웠다는 자평(自評), ‘졌잘싸’이다. 무능과 책임회피의 새로운 이모티콘이다.

나라가 어렵고 어지럽다. 푸른 용 갑진년에는,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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