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만에 축조된 정의현성…500년간 중심 읍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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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정의현청 이설 600주년을 맞은 성읍리를 가다

600주년 기념행사서 각종 전통음식·민속문화 통해 보존 가치 알려

자연·문화·무형 유산 원형 보존돼 옛 제주의 숨결 고스란히 느껴져

▲옛 성읍리의 추억에 빠지다

유년 시절, 필자의 아버지는 고향 성읍초등학교 교장이었고, 학교는 옛 정의현 객사(客舍) 터에 있었다. 정의현 객사는 탐라순력도(1702년)의 ‘정의강사’와 ‘정의양로’ 그림에 뚜렷하게 등장한다. 객사는 관아건물로서 조선시대에는 전패(군주를 상징하는 殿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를 모셔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배례했던 건물로, 어사 등 관원들의 숙소로도 사용됐다. 이형상 목사의 순력 때는 이곳에서 고을 노인들을 모셔 잔치를 베풀고, 유생들의 강(講)과 군사들에게 활쏘기를 겨루게 했다. 


1909년 정의공립보통학교가 개설되면서 이곳은 교사(校舍)로 활용되고 허물어졌다가 2001년 복원됐다. ‘천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는 학교 뒤에 위치한 ‘고뭇동산’은 어릴 적 마을의 놀이터였다. 가을엔 ‘육백 년 된 팽나무’ 가지에 달린 열매를 따 먹고, 관리가 안 되어 을씨년스럽던 정의현 동헌 옛 건물에서 숨바꼭질하고, 그 앞뜰에서 축구도 했다. 고뭇동산을 중심으로 남쪽 동네를 알동네, 북쪽 동네를 웃동네라 한다. 


▲600년 전 길을 기억으로 찾아 나서다


유년시절 부친을 따라 수산리 친척 집에 ᄆᆞ실 가는 길은 웃동네를 거쳐 영주산을 지나는 길이다. 북쪽 성곽을 지나면 웃동네인데, 민가를 조금 지나면 논(현 농협성읍지소 자리)이, 맞은편(현 노인당 자리)에는 우마가 물을 마시고 빨래도 했던 넓은 연못이 있었으며, 마을 북쪽 끝에는 삼거리가 있다. 


지금의 번영로 쪽은 우마차가 다녔던 좁다란 길이 ‘구렁팟’(성읍2리)으로 이어지고, 성산 방향으로는 20여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냇도’ 동네가 있다. 산냇도 동네를 지나면 천미천이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지만, 당시는 잘 다듬어진 큰 돌들이 놓여 있어 마차가 다닐 수 있었다. 천미천을 지나면 인가가 없다.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당시의 수산 가는 길은 비로 파헤쳐진 곳이 많아 고무신을 신은 나로서는 걷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성읍리에서 성산읍 고성리까지 차로 20분, 옛날에는 어른들도 걸어서 4시간 이상 걸렸다. 그 길이 성산읍 고성리에 있던 정의현청이 1423년, 600년 전 지금의 성읍리(당시는 진사리)로 옮겨간 길이리라.


▲성읍 정의현청 설치


조선 조정은 1416년(태종 16) 고려시대의 동·서도현 제도를 폐지하고 한라산 북면에 제주목, 산남은 동쪽에 정의현, 서쪽에 대정현을 둔 1목2현제를 실시했다. 정의현은 정의현(성산읍 고성리)을 본읍으로 삼고, 토산현(토산1·2리), 호아현(남원 신·하예리), 홍로현(서귀포 동·서홍동)의 3현을 관할 지역으로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제주에는 1404년(태종 4)과 1406년에 왜선 수십 척의 침입으로 피해가 막심했다. 


이에 고성리에 정의현청을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423년(세종 5) 왜구 침입에 대비하고 정의현 전 지역을 효과적으로 관할하기 위해서 정의현청을 고성리에서 진사리(지금의 성읍리)로 옮긴다. 성읍 정의현성은 제주 3읍 백성들이 동원돼 1423년 1월 9일부터 13일까지 5일 만에 축조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다. 이때부터 1914년 정의군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간 성읍 정의현성은 3읍성의 하나로써 산남 동쪽의 중심 읍성의 역할을 한다.

▲성읍 정의현성 600주년 기념행사


정의현청 성읍 이설 600주년 되는 해를 맞아 지난 11월 3일부터 5일까지 다양한 역사문화 축제가 성읍리에서 열렸다. ‘600년의 역사 일천 년의 미래’라는 슬로건으로, 정의현성 남문 앞 공연장에 성읍 9개 반별로 부스마다 전통음식(보리빵·빙떡·모멀죽·오메기떡·모멀만듸·상외떡·둘레떡·시리떡 등)을 만들고 먹어보는 시식체험과 민속문화를 재현하는 행사(조팟불리기·검질매기·도리깨질·방에질·ᄀᆞᄀᆞ기·ᄎᆞᆯ비기·영장행렬·달구질 등)가 다양하게 펼쳐졌다. 


오래전 제주 여러 마을에서 행해지던, 지금은 오직 성읍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민속문화제가 열린 것이다. 이 때를 맞아 주민들은 함께 민요를 부르면서 흥을 돋우며 마을의 단합을 도모한다. 성읍리는 전국에서 민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여전히 천년세월이 고스란히 흐르고 있는 성읍마을에는 사시사철 민속의 고장다운 운치와 기운이 넘친다. 고 김영돈(제주대 교수)은 성읍리를 ‘민요의 저장고’라 칭했다. 그 먼 길을 걸어와 김교수가 채록한 성읍리 민요는 지금, 제주민요로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날 제주목사 순력행차 재현도 있었다. 성읍리 주민들이 다 같이 참여하여 취타대를 앞세워 목사, 육방 아전, 군사, 백성들 약 200여 명이 옛 복장으로 행렬해 관광객들에게 큰 갈채를 받았다. 이외에도 오메기술, 고소리술, 전통혼례, 도축문화 재현이 있었고, 성읍마을의 가치와 보존, 발전을 생각해보는 ‘정의현성 600주년 기념 컨퍼런스’도 열렸다.


▲성읍마을의 가치


성읍리에는 다양한 문화재가 원형 모습으로 남아있다. 국가유산인 문화재를 자연·문화·무형 유산으로 나뉘어 구분하는데, 자연유산에는 1000년 느티나무와 600년 팽나무 숲 등이 있다. 문화유산으론 옛날 그대로의 초가, 성곽, 현감 집무소인 근민헌, 향교, 객사, 돌하르방 등이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다양한 전통음식, 민속문화, 초가집 짓는 기능 등이 있다. 


또한, 무수히 많은 민요가 전해지는데 ‘맷돌-방아노래·밭밟는 노래·타작노래’ 등의 노동요와 ‘행상노래’ 등의 의식요, ‘용천검·계화타령’ 등의 창민요가 있다. 돌담, 올레, 정소암 화전놀이도 빼놓을 수 없다. 성읍리는 일부 박제화된 민속마을과 달리 주민들이 실제 거주하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다. 일부러 치장하고 꾸며서 만들어진 곳이 아니기에 인간의 귀소본능을 자극하며 돌아가 쉴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그러기에 이 소중한 가치를 길이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도 어머니 품처럼 편안하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보존해야 하리라.  

      
글·사진=강문석 (사)질토래비 전문위원·성읍별곡사진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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