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표구, 선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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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한 여류 한글서예가에게서 표구를 받았다. 정성스레 싸고 보낸 손길에 발신인을 확인하며 놀랐다. 서예전 참가 회원작품들을 수록한 도록이 들돌의 무게같이 묵직해, 보낸 작품을 열어 보기도 전에 창작의 열기로 화끈했다.

보낸 이는 아내의 초‧중학교 동창으로 학교장(인화초)을 지낸 김태희 선생의 사모님 고순랑 여사였다. 김 교장과는 교직에 있으면서 공사로 자주 만나 친교해 온 허물없는 사이지만 실토하건대, 고 여사님과는 기회가 닿지 않아 썩 임의롭지 않다. 선물을 앞에 놓고 면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표구는 족자, 곧 현폭(懸幅)인데, 폭이 넉넉하고 길이 또한 길어(35×120cm) 한눈에 품격이 느껴졌다.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이 주최한 22회 ‘한글문화큰잔치’에 출품해 문예회관에 전시했던 서예가 고순랑님의 소중한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전시했다가우송으로 부쳐온 작품이다. 서예가님의 따뜻한 선물을 받고 아내가 말로 하기 어려운 고마움을 전하자, 거리낌 없이 말씀하더라는 언사가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김 선생님의 시가 너무 좋아서 제가 쓴 거지요.” 군말않고 간결하게 한마디에 함축한 것. 내 등단30년 회고집 속 시집 ‘너울 뒤 바다 고요’에 실린 98편의 시를 다 뒤적여 1편을 뽑아 휘호했으리라. 서예가님의 그 고집스러운 선택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졸시 ‘설화雪花’에 눈이 머문다.

“오로지 흰색/ 하나의 색으로 순일하다는 게/ 마음에 닿으면/ 놀라워 또 쳐다보곤 한다/ 몰아치는 눈보라에/ 색색이 피우면 온기도 돌 것을/ 꼭 흰색 하나만 고집하는/ 이젠 어쩔 수 없는/ 눈 시리게 하는/ 저 운명성/ 해마다 단풍 하나 물들이지 않고 맞는/ 한 철 겨울의 생애가/ 애틋해/ 눈 오는 날이면 눈이/ 눈 덮인 산에 가 있다 (전문)”

나는 서예를 모른다. 붓을 잡으면 손이 떨리니 운필부터 자신이 없다. 그런 처지라 작품을 눈앞에 놓고 꿀 먹은 벙어리가 돼야 하니 답답하고 한편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이 점 고 여사님께 해량(海諒)하십사 고개 숙인다. 고 서예가께서는 오래전부터 수십년 간 한글 서예에 매진해 온 원로 서예가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한글사랑서예대전 초대 작가, 세계서법대전 초대 작가‧심사위원, 남농서예대전 초대 작가였던 이력을 거쳤다. 아는 이는 다 아는 일이다. 세종한글서예대전에서 특선의 영예를 누린 바 있는 관록의 서예가다. 현재 한글서예사랑모임과 한국서각협회 이사로 있다.

여담 하나. 고 서예가의 남편 김태희 교장과 아내는 어린 시절 한 학급으로 같은 교실에서 9년을 함께 공부한 동창생이다. 그들 동창생들의 우정이 유별할 게 아닌가.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반말로 한다면 쉬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믿기지 않는 엄연한 사실이다. 실제 쉽지않은 화법인데, “누구냐? 나다.” 식이다. 여든의 나이에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오고가는 모습이 여간 부럽지 않다.

시 표구 선물도 시가 좋아서라기보다 동창들 간, 주고받음의 정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한다.

덧없는 인생을 살며 이런 인연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족자를 거실에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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