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일색의 화풍에서 구상미술 고집...관조의 경지에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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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술의 토대는 어릴적부터 고등학교까지 지낸 제주"

'이것은 돌입니다' 시리즈로 두각...세계로 이름을 알리다
청중들이 지난 15일 제주웰컴센터 강당에서 열린 고영훈 화백의 강의를 듣고 있다.(고봉수 기자)
청중들이 지난 15일 제주웰컴센터 강당에서 열린 고영훈 화백의 강의를 듣고 있다.(고봉수 기자)

제주시 건입동에서 태어난 고영훈 화백(71)은 어릴적부터 유교적 가풍이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용강마을에서 별감을 지냈다. 제사때마다 별감 사령장을 보여주며 “네 할아버지는 학자다. 너도 커서 학자가 되거라”라고 하던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고 화백은 어릴적 사라봉 기슭에서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하며 친구들에게 계급장을 그려주는 작업을 전담했다. 고 화백은 “초등학교 입학 전 사라봉에서 뛰어놀 당시 친구들로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인정을 받은 것 같다.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게 그때부터 시작된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자식이 학자의 길로 가기를 바랐던 그의 부친도 어릴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아들을 나무라지 않고 적극 응원했다. 고 화백은 “초등학교 미술부로 활동하며 여러 대회에 나갈 때마다 아버지가 따라왔다. 당시에는 야외에서 심사위원들이 손을 들고 입선 여부를 결정했는데 아버지가 심사위원이 아닌데도 심사석쪽에 들어가 손을 들며 나를 응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작가를 만드는 데 있어 과외를 하거나 유학가는 것보다 중요한게 가족의 응원과 격려다. 어릴 적 아버지의 관심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며 “제자를 지도할 때 기초 실력은 따지지 않고 부모의 관심 여부를 반드시 확인한다”고 말했다.

 

▲내 예술의 토대는 제주

고 화백이 초등학교 다닐 당시만 해도 그림이라고 하면 ‘영화극장 간판’, ‘문자도’ 정도였다. 생활에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고 화백은 중학교로 진학하며 수재로 인정받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참가한 국제적십자미술대회에서 ‘중등부 최고상’을 받았다. 당시 천경자 화백으로부터 “어린 아이가 가상하다”는 말을 들었다. 고 화백은 “중학교 다닐 때에는 아버지가 각종 대회에 따라와 힘을 실어줬다”며 “내 그림은 고등학교 때까지 제주에서 보낸 삶의 토대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고 화백은 “애초 관심이 없고 성적도 안되는데 부모가 의대 가라고 하면 자식은 공부하기 싫어진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일찍 몸에 익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어떻게 컨트롤하는가에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어떤 분야든 도전하는 학생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칭찬하며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극사실 회화 입문

도자기의 매끈한 표면, 세월이 느껴지는 갈색 홈, 사용했던 사람들의 미세한 흔적….

극사실 회화는 실제처럼 보이는 극도의 사실적인 그림을 말한다. 고영훈 화백의 ‘달항아리’ 시리즈는 캔버스에 손을 얹으면 만져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 화백이 입학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 그림은 추상 일색이었다. 페인트를 캔버스에 아무렇게나 흩뿌리는 게 새로운 미술이라며 각광을 받던 때였다. 새 화풍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고 화백은 시류에 따라가지 않고 자신이 잘하는 구상에 정신이 깃든 작품을 그리기로 했고 그래서 세상에 나온 것이 ‘This is a stone(이것은 돌입니다)’ 시리즈다.

그는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차원만 다를 뿐 허상이 아닌 실물이라는 생각으로 일상의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돌을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대학생 시절 하늘, 땅, 나무, 물, 돌 등 다섯 가지 자연물 중 하나를 선택해 그리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땅은 너무 복잡하고 나무는 시시해보였다. 물은 그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돌에 끌렸다”고 말했다.

고 화백은 “앞서 돌을 그린 그림이 없어 포기했다가, 대학 3학년 방학을 맞아 고향에 왔을 때 돌을 보고 다시 그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제주 돌을 가지고 갈 수 없어 홍대 뒷산에 있는 돌을 가져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문명을 상징하는 책장 위에 돌과 오브제, 꽃과 나비를 배치하며 다양한 변주를 시도해 온 고 화백은 2000년대 초반 ‘달항아리’ 시리즈를 내놓았다.

극사실적으로 그려진 도자기는 그 자체로 충분한 회화성을 획득하며 중력과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영훈 화백이 지난 15일 제주웰컴센터 강당에서 자신이 걸어온 삶을 들려주고 있다.
고영훈 화백이 지난 15일 제주웰컴센터 강당에서 자신이 걸어온 삶을 들려주고 있다.

▲달항아리를 그리다

고영훈 화백은 달항아리를 그리게 된 계기도 풀어놨다.

그는 “2002년 어느날 가나아트 회장님이 좋은 게 있다며 달항아리 한 점을 가져왔다. 당시 꽤 엄청난 가격이었다. 그때까지 달항아리를 그리는 스타일의 그림은 없었다”고 말했다. 고 화백은 떨리는 마음으로 달항아리 앞에 돗자리를 깔고 밥상에 정화수를 올려놓은 다음 두 가지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첫째는 제발 그림이 되게 해 달라는 것, 나머지 소원은 작업 중 깨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 화백은 “그림 두 점을 완성한 뒤 전면 그림은 달항아리 주인에게 선물했고, 뒷면을 그린 그림은 지금까지 내가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도공이 처음 빚은 달항아리는 유약을 바르고 불로 구울때는 신의 영역이 된다”고 했다. 모래가 들어간 도자기가 산화되고, 타들어가는 장작더미 티끌이 도자 표면에 박히는 것은 도공의 손을 떠난 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항아리 공간에 흐르는 시간이 함축돼 있다. 시간의 흐름에 더해진 가변성의 요소까지 담아 최대한 실물에 가깝게 그리고자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고 화백은 “비어있지만 차있는 게 항아리다. 비어있는 것은 채우기 위해, 차 있는 것은 비우기 위해 있다”며 “이것과 저것에 대한 구분이 없을 때 비로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로 이름을 알리다

지난해 3월 서울 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에서 개관 기념으로 열린 ‘고영훈 초대전’에서는 환영과 실재, 이미지와 대상의 구별이 없는 ‘호접몽(胡蝶夢)’을 주제로 한 전시였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는 장자의 ‘호접지몽’을 명제로 내세워 본질과 이미지의 경계와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물아일체의 상태를 넘어 ‘관조’의 경지에 도달한 작업 철학을 보여줬다는 극찬을 받았다. 프랑스 센 강변에는 첨단 공법으로 지어진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고영훈 화백의 작품 ‘4개의 돌’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고 화백은 “제 작품을 모델로 설계한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은 현대 건축의 새로운 장르로 평가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고 화백은 1987년 대한민국 미술기자상, 1991년 제1회 토탈미술대상을 수상했다. 루네빌민술관(프랑스), 디트로이트미술관(미국), 네덜란드 베아트릭 여왕 콜렉션(네덜란드), 프랑스 안시 문화원(프랑스), 요코하마 비즈니스 공원(일본) 등에 작품이 소장되는 등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끝>

<김문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제주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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