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에 무슨 4·3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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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한 해가 다 가는 지난 주말 ‘강정마을 4·3길’ 순례를 했다. 강정바다가 보이는 마을 언덕에는 평화의 노란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런데 제주해군기지 강정마을에 무슨 4·3길 순례?

1947년 3월 1일 중문국민학교에서 열린 제28회 3·1절 기념식에 중문면민이 2500명이나 모였다. 거기에는 강정주민도 참가했다.

같은 날 제주 성내 3·1절 기념식 총격사건은 3·10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중문지서 순경 6명 전원이 파업에 동참했을 만큼 주민들도 적극 동조했다. 강정주민 16명은 제주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4·3군사재판에서도 23명이나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다. 전과자가 된 것이다. 2023년 3월 기준 강정마을 4·3희생자는 중문면 11개 마을 가운데 가장 많은 178명이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 벌어진 경찰의 총격은 정당방위이고 항의는 폭동으로 몰았다. 육지경찰과 서청이 들어왔다.

75년 전 4·3 이후 64년 만에 서울경찰청과 경기경찰청 대규모 경찰병력이 제주에, 강정에 들어왔다. 결국 강정에 ‘제주해군기지’는 건설되고 말았다.

은빛 은어의 강정천은 메말랐다. 천연기념물 ‘녹나무’와 멸종위기 종인 ‘붉은발말똥게’ 등 다양한 생물권은 없어졌다. 까마귀쪽나무가 자라던 구럼비 바위는 폭파됐다. 마을공동체도 파괴됐다. 이 사태를 두고 ‘제2의 4·3’이라고도 한다.

4·3 계엄령이 발동되기 전인 1948년 11월 16일 강정마을에, 첫 집단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군경은 ‘강정향사’에 성담 쌓기에 참여하지 않은 주민 15명을 ‘당동산’에 끌고가 총살했다. 이 당시 중문지역 주둔 군부대는 서청특별중대(중대장 서봉호 소위)였다.

11월 21일, 이 당동산 학살사건으로 강정주민들은 몸을 숨겼다. 군경은 주민들을 다시 향사에 모이게 했고 명단을 대조하며 30여 명을 향사 인근 서울밧’에서 총살했다.

이와 같은 4·3가해는 군경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용흥마을은 4·3이후 조성된 마을인데 성을 쌓고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무장대는 1948년 12월11일, 성을 지키던 민보단을 공격해 17명이나 죽였다.

‘강정초등학교’는 메모루동산에 위치한다. 메모루동산은 도피자가족 11명이 학살된 곳이다.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젊은이들은 목숨 부지하기 위해 숨었다. 부모들이 대신 죽었다. 메모루 동산 강정초등학교에는 서청특별중대 육군소령 서봉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발전 공로자와 재일동포 공적비와 함께 버젓이 세워져 있다.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는 매일 아침 7시에 해군기지를 향해 100배 의례를 올린다. 낮 12시에는 강정평화 인간띠 잇기 행사를 한다. 10년도 넘게 진행하고 있다. 그 역사의 현장을 순례했다. 평화센터 수녀님은 4·3순례단 일행에게 ‘한 달 후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미안함과 동시에 다시 강정에 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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