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이 환기하는 절망과 희망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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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논설위원

역사가 ‘기억’을 통한 투쟁의 장이라면, 문학예술은 역사를 다루면서도 ‘기억 너머’에 도사린 ‘진실’과 ‘절망적 현실 또는 희망’ 같은 걸 건드리는 장이다. 역사가가 기록하지 못하는 당대인들의 행동과 숨결 따위를 형상화함으로써 기억보다 강한 망각을 현재화하는 게 문학예술이다. 아슴푸레한 안개를 뚫고 또렷한 인물들이 되살아나고, ‘절망과 희망의 현실’을 환기한다.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의 흥행은 영화의 장르적 특성도 있겠지만, 영화가 절망의 현실을 환기하는 강한 힘을 내장하므로 가능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 헌정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며 시작된 ‘서울의 봄’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있기 전까지만 이어진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프라하의 봄’이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무력으로 멈춰 섰듯, ‘서울의 봄’도 신군부의 무력으로 끝장나 버렸다. 영화는 ‘서울의 봄’을 멈춰 세운 쿠데타 과정 9시간을 그려낸 것이다. 권력욕에 취한 전두광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군사 반란 세력, 그것을 막아서는 이태신을 중심으로 한 저항 세력의 대결을 생생하게 현재화했다. 영화 관람객은 군사 반란을 실제 눈으로 본 듯 분노했다. 


그런데 영화는 세부 이야기와 설정에 상상력을 더한 것이다. 감독은 “반란군 내부에서 오갔을 모의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무합니다. 이 9시간에 상상력을 더해 극적인 긴박감을 형성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대립이 현실이라면 영화는 이태신과 전두광의 대립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태신이 행주대교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혼자 2공수부대를 막아서는 일은 실제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전화로 이루어진 명령이었다.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이 조작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국민을 선동한다고 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극우단체는 역사 왜곡 영화를 단체 관람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확성기를 틀어댄다.


물론 영화는 역사 자체가 아니며, 허구 너머의 진실을 담아내는 장르다. 끝이 없는 역사적 데이터의 나열이 아니라, 절망과 희망의 현실을 환기하는 ‘서사’가 영화다. 「서울의 봄」은 민주화를 거스르는 신군부의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주의 열망에 대한 탄압 등을 이어갔던 악의 근원을 서사화하면서, 나침반 없이 표류하는 현재 권력을 연상케 하는 환유로 기능한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입니까!”라는 전두광의 대사, ‘하나회’ 멤버들의 기념사진 촬영 장면은 반란 세력이 현재까지 이어짐을 강렬하게 이야기한다. ‘하나회’는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과 연결된다.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라는 이태신의 대사는 무너져가는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사라진 ‘서울의 봄’을 다시금 쟁취해야 한다는 ‘희망’을 전달한다.


군사 반란에 성공한 전두광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며 웃는다. 시나리오의 대사는 “하하하”라고만 되어 있는데 배우는 기묘한 웃음으로 변화시킨다. 득의에 찬 미치광이의 웃음, 그리고 우리를 향한 비웃음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음을 느낀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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