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자긍심으로 지속가능한 민속마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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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정의현청 성읍이설 600주년에 즈음한 성읍민속마을 탐방

한라산 동남 지역 관할하던 고을
일제강점기로 읍치(邑治)의 위상 잃어

해안보다 늦은 개발로 인적 끊겨
1974년에야 도로 포장·전기 공급

▲500년 정의현청 고을이 ‘은둔의 산골마을’이 되다


조선 조정은 제주도 전체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고려 때의 대촌현(제주시) 중심의 동·서도현제를, 1416년(태종 16)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1목2현 체제로 바꾼다. 


3읍성의 하나인 정의현청은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다가, 7년 뒤인 1423년(세종 5) 지금의 성읍으로 옮겨진다. 이렇게 정의현청 소재지가 된 성읍마을은 약 500년간 한라산 동남지역을 관할하는 유서 깊은 고을이 된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정의군이 폐지되면서 그간의 읍치(邑治)로서 지녀왔던 위상을 잃게 된다. 1918년 제주 해안가에 일주도로(신작로)가 개설되면서 해안마을들이 새롭게 부상하는 반면, 중산간 마을들은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1935년 면소재지가 성읍에서 표선으로, 면의 명칭도 동중면에서 표선면으로 바뀌고, 오래전 제주목사가 정의현성으로 순행하던 제주·봉개·와흘·선흘·대천동·구렁팟·성읍으로 이어지던 길도 인적이 끊겨간다. 이렇듯 성읍마을은 섬 속의 섬이 되어 바깥과는 동떨어진 은둔의 산골마을이 된다.


성읍마을에 신식문물이 들어온 것은 1966년 3월 20일 표선-성읍 간 버스가 다니면서부터이다. 제주시에서 일주도로를 거쳐 표선리를 경유해 저녁 늦게 성읍에 하루 한 번 오는 버스는, 이곳에서 정박하고 다음 날 아침 떠났다. 해안마을에 비하면 50여 년이나 늦은 버스 개통이다. 표선 오일장 날, 만원버스를 타지 못한 아이들은 중학교가 있는 표선까지 자갈길 7.4㎞를 걸어 등교하던 일이 허다했다. 하루 해가 저물어 가면 어린이들은 ‘고뭇동산의 천년 느티나무’에 올라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을까 궁금해 하기도 했다. 1974년이 돼 도로가 포장되고 전기가 들어오고, 마을 몇 군데 공동 수돗가가 생겨나는 등 마을이 서서히 달라져 갔다. 


▲정의현 중심 마을의 근대역사를 기억하다

초가지붕을 새로 이는 작업은 성읍마을의 연중행사 중 하나였다.
초가지붕을 새로 이는 작업은 성읍마을의 연중행사 중 하나였다.

초가지붕을 새로 이는 것은 성읍마을이 행해야 하는 연중행사의 하나였다. 지붕 이는 작업은 힘센 장정들이 7, 8명씩 팀을 만들어서 했고, 아녀자들도 지붕을 이는 새끼줄을 만드느라 바빴다. 성인 남자들은 굴묵과 정지에 불을 지피고 소와 말이 먹을 ‘촐’을 장만하느라 ‘촐밭’에 간이 움막을 짓고 며칠을 살기도 했다. 한가해지면 남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꿩 사냥을 나갔다. 그날 저녁 꿩 몇 마리 잡았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면서 작은 동네잔치가 열리고, 먹을거리를 얼마씩 들고 와서 마당에 둘러앉아 오메기술을 마시며 떠들썩했다. 흥이 나면 저절로 민요 가락과 춤사위가 펼쳐지고, 노래 잘하는 사람이 앞소리를 부르면 나머지 사람들이 뒷소리를 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어머니를 따라가서 들었던 민요 중에 ‘너영나영’이 특히 기억난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의 매번 바뀌는 앞소리를 따라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고요,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의 뒷소리가 이어지면서 한참이 돼야 끝난다. 

지금은 성읍 주민들로 구성된 ‘제주민요보존회’가 201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민요의 보존과 확산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10년대의 ‘성읍 정의현성 내 지적도’에는 남문 부근을 허물어 북성을 관통해 웃동네로 이어지는 일직선 도로와 휘어진 옛날 마을 안길 등이 표시돼 있다. 그 많던 관아 건물들은 이미 사라졌지만, 관청이 들어섰던 곳은 국유지로 남아있어, 사라진 관아의 위치를 추측케 한다. 

1910년대의 ‘성읍 정의현성 내 지적도’. 남문 부근을 허물어 북성을 관통해 웃동네로 이어지는 일직선 도로(노란색)와 휘어진 옛날 마을 안길(파란색) 등이 표시돼 있다.
1910년대의 ‘성읍 정의현성 내 지적도’. 남문 부근을 허물어 북성을 관통해 웃동네로 이어지는 일직선 도로(노란색)와 휘어진 옛날 마을 안길(파란색) 등이 표시돼 있다.

1970년대까지 성읍마을의 모습은, 1702년 그려진 ‘탐라순력도 정의조점(旌義操點)’의 모습과 그리 차이가 크지 않아 보인다. 600년 된 팽나무들과 1000년 수령의 느티나무는 여전히 성읍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나지막한 초가집들 역시 옛날 성읍마을의 정취를 가늠케 해준다. 

▲제주 유일의 국가지정 성읍민속마을의 미래를 그려보다

초가집들이 복원된 성읍민속마을에서는 옛날 성읍마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초가집들이 복원된 성읍민속마을에서는 옛날 성읍마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마을 전체가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가 되면서 1910년 읍성철폐령으로 사라졌던 정의현성 동·서·남문과 옹성과 치성 등이 복원되고, 객사도 웅장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초가들을 비롯한 오래전 삶의 모습들도 되살아났다. 문화재의 발굴과 보전은 관련 역사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의 증언이 종합돼야 한다. 해당 유적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고 발굴 결과로도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는 주민들의 증언이 특히 필수적이다. 복원된 지금의 성곽 치(성벽에서 ‘ㄷ’자로 나와 있는 구조물)와 문루, 객사와 근민헌, 초가집 보수 등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 

눈 덮인 성읍 민속마을의 모습. 성읍 마을의 설경이 운치를 자아낸다.
눈 덮인 성읍 민속마을의 모습. 성읍 마을의 설경이 운치를 자아낸다.

또한, 외형적인 모습에 치우치다 보니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마을 저변에 흐르던 운치가 도외시된 점도 있다. 지속가능한 민속마을은 마을주민들의 자긍심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따라서 성읍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성읍의 역사문화에 대한 식견을 높이는 한편, 관과 주민들이 얼굴과 머리를 마주해 옛 운치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 되길 염원한다. 그리하여 제주 유일의 민속마을로서의 가치가 더욱 높아져가는 성읍마을이 되길 또한 소원한다.     


글·사진=강문석 (사)질토래비 전문위원·성읍별곡사진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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