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들이 말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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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정 (시조시인)

한해의 매듭을 짓는 12월의 첫날, 4·3 전주 순례길에 동참했다. 날씨조차 영하권으로 전주로 가는 길은 몸과 마음을 더욱 움츠리게 했다. 긴 세월이 흐른 탓에 전주형무소 자리는 주택가로 변신해 있다.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동서남북 방향에 맞춰 짐작만 할 뿐이었다.

6·​​​​​25가 나자, 전주형무소의 수감자 1,400여 명은 전주 주변 여기저기서 학살되었다. 수형인명부에서 확인된 제주 출신 142명의 4·3 수형인들 역시 집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지만, 마지막 길은 학살터였다.

황방산 기슭, 전주 시내가 된 학살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추모관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었다. 그 뒤편으로 작년까지 발굴했다는 현장은 아직 풀도 나지 않은 황토, 자체로 비극의 흔적을 대변하고 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이파리를 걷어 4·​​​​​​​3도민연대에서 준비해 온 제수를 진설하고 142명에 대한<전주형무소희생자 진혼제>를 올렸다. 75년 만에 제주의 후손들이 엎드린 것이다.

다음 날, 김경만 감독의 제작한 다큐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를 관람했다. 진지동굴 안에서 보이는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더없이 맹렬했다. 제주의 풍경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지만, 그 너머에 살육의 현장을 어찌 입으로 다 말할 수 있을까. 4·​​​​​​​3의 소용돌이와 교차하며, 다섯 할머니의 4·​​​​​​​3의 증언은 꾸덕꾸덕하게 붙은 피딱지를 떼어내듯 처절한 아픔의 기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감되었던 네 명의 할머니는 모두 전주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증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차마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잔인한 시간을, 깊은 곳에 묻어둔 상흔을 누구에게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광경을 말하고 싶지 않아. 집에다 불붙이면서 잡아가니까 소낭 밭에 숨었다가 내창더레 곱았당 게나제나 우터레만 살젠 올랐쭈게. 총 맞아 죽는 건 행복헌 거주 죽창으로 질르민 한 번에 죽지도 않아,” 들어도 또 들어도 몸서리치는 끔찍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재심으로 무죄판결이 날 줄 몰란. 을큰허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4·​​​​​​​3, 그런 세상 엇주.” 증언했던 할머니 중에 두 분을 이미 돌아가셨다.

4·​​​​​​​3도민연대는 이십 년 전부터 4·​​​​​​​3의 흔적을 찾아서 전국을 순례하고 있다. 또 진상조사단을 꾸려서 전국 형무소의 기록을 찾아 희생자 한 명이라도 유족을 찾아 주려고 애쓰고 있다. 유족들도 알 수 없었던 일들, 짐작만 하고 있었던 일들을 기적적으로 찾아내어 그동안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는 많다. 형무소의 4·​​​​​​​3 자료는 국가기록원의 공식 명부인 수형인명부밖에 없다. 피해자와 유족들이 돌아가시면서 4·​​​​​​​3의 증언은 점점 매몰되어 간다. 더 늦기 전에 인지상정으로 찾아 나서야 할 때다. 돌들이 말할 때는 이미 늦어 후회조차 죄스러울 것이다. 시나브로 또 한해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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