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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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12월, 이 해의 마지막 달이다. 또 한 해가 저문다. 왜 그럴까. 한 해를 살면서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하던 달력에 오늘따라 눈이 오래 머문다. 멍때린다. 여태껏 쌓아 온 시간의 잔해마저 가뭇없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을 뒤적여도 밖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시간이 스쳐간 흔적조차 없다. 어느새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까. 웬일인지 짧아진 하루가 끌고 내린 산 그림자기 유난히 길다. 새해를 맞는다며 들썩이던 기대와 환희의 순간들이 일 년이란 시간을 소진해 버린 언저리로 한 자락 찬바람이 들락거릴 뿐, 사위 적막하다.

나를 스쳐지난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루가 24시간이니 365일을 곱하면 산술적으로도 엄청나다. 그 시간을 무얼 한다고 알맹이 하나 남기지 않고 까먹었는가. 나이 들어 굼뜨고 무딘 깐에 앞뒤 재며 요량하고 만지는 것조차 뭉그적대니, 이걸 이뤘네요 하고 내놓을 아무 것도 없다. 낯두껍게 삼시세끼를 받아앉자니 집사람 보기가 민망하기 짝이 없는 요즈음이다. 헛웃음에 귀신 나락 까먹는 소릴 얹어가며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는 잔재주만 늘어간다. 어린아이 장난기 같다.

그나마 남긴 게 있다면 책 한 권 낸 것이라 할까. 지난해가 등단 30년이라 ‘30년 회고록’ 『여든두 번째 계단에 서다』가 그것이다. 시집 『너울 뒤 바다 고요』와 수필집 『내려놓다』를 통권으로 묶은 묵직한 저술로 내 문학의 발자취로 남게 될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엉성해 덩치만 키운 물건 같다. 그러고서 한 달 만에 불쑥 다그친 12월, 한 해의 끝자락을 딛고 서니, 한때 마음자리를 채웠던 충만감이 삽시에 사라져 버린다. 와락 그 자리로 내려앉은 텅 빈 부재. 시든 풀 서걱이는 바람 난장의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만 같다. 12월은 내게 공허의 달인가. 헛헛하다.

백세를 얘기하지만 가당찮다는 생각이다. 수요장단을 주관하는 판관이 따로 있는데, 무슨 허방이고 주책인가. 팔순에 줄섰더니 달라졌다. 하던 일도 챙기지 못하는 깜냥에 무얼 새로 시작할 것인가. 쑤시고 헐떡거리고 절름대는 데다 숨차고 눈 침침하고 귀 어둡다. 하지만 내게 허여된 시간을 허비하진 말아야지. 낭비는 죄다. 허위허위 높은 등성마루에 올라 해의 마지막 일락서산을 바라보기 전, 내가 내게 철석같이 언약해야지. 오로지 하리라 한 글쓰기만은 놓지 않으리라고. 비록 병을 안고 사는 포병객일망정 머릿속 맑은 시간에 깨어나리라. 그리고 빛이 오는 동살을 우러러 꿇어앉아야지. 새벽에게 겸손해야지. 그리고 시 몇 줄 끼적여야지….

먼 데, 가보고 싶은 데를 밟지 못할지언정 아파트 숲길이라도 걸어야지. 땅이 파이게, 몸이 지치게 걸어야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문뜩 떠오르는 기억 저편의 시 한두 구절 소리 내어 읊어야지, 입 부르트게 목이 쉬도록 노래해야지, 가는 시간 가로막아 서서, 쓰고 고치고 맑고 밝게 닦아 곱게 빛나게 해야지.

또 한 해가 저물려 한다. 감쪽같이 저물던 해도 그 밤이 지나고 나면 떠오르더라. 늘 떠오르던 그 자리로 떠 오르더라. 새해 새 아침의 싱그러운 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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