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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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수필가

바람이 제법 차다. 가을이 깊어가는 오후, 운동 삼아 빌라 단지를 돌고 있는데 쌀쌀한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새싹이 돋아나듯 수선화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지난겨울 무리를 이룬 하얀 수선화 꽃들이 보기만 해도 흐뭇했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올 모양이다. 삼십 여 년 전 시골 학교에 근무할 때다. 졸업을 앞두고 6학년 담임인 후배교사는 마을 안에 수선화가 많이 있다며 졸업생들에게 수선화 송이를 가슴에 달아주자고 하였다. 선생님이 만들어 준 수선화 꽃묶음을 가슴에 달고 그들은 새봄을 향해 꽃처럼 피어 났으리…, 수선화를 볼 때마다 흐믓한 기억이 함께 한다.

봄이 익어가는 무렵쯤엔 산책삼아 자주 오르는 민오름 자락에 치자 꽃 하얀 길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꽃길이 길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허리쯤 오던 치자 꽃무리가 이젠 내 키를 웃돌아 꽃 속에 묻힌 듯 하늘하늘 걸어갈 땐 기분이 좋다. 길이 짧아 되돌아 걸으며 꽃무리에 살짝 머리카락을 스쳐보기도 한다. 톡 쏘는 듯한 치자향이 왠지 젊음을 느끼게 하여 자주 찾는다.

어제는 지인아들의 결혼식에 갔는데 어여쁜 신부의 손에는 순백의 카라꽃 부케가 있었다. 모두가 축하의 덕담을 나누며 웃는다.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는 젊은 한 쌍에게 보내는 축하의 메시지, 그 안에 카라꽃 아름다움이 하얗게 빛난다.

한라산에 가장 가까이 있는 요양병원, 때론 병동 주변의 산책로를 생각 없이 타박타박 걸으며 십년 가까이 병상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어머니의 세월을 느껴본다. 어머니는 뱃속의 장기에서 농양이 생기고 그 염증수치가 높아 대학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요양병원으로 왔다. 그러기를 올해 들어 두 번했고 이제 세 번째 다시 대학병원에 갔다. 처음 대학병원에서 한 달 정도 치료하다 의료원으로 돌아갔을 때 담당의사 선생님은 치료도 하지 않고 그냥 보내면 나는 어찌하느냐는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다. 농양덩어리들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면 좋으련만 고령이어서 수술은 안 되고 항생제나 진통제외에는 치료방법이 없다고 대학병원에서는 퇴원을 종용했다.

어쩔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아직은 젊어 보이는 여의사는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함께 인간적인 고뇌를 순간적으로 드러내 보인 듯하였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내 딸과 사위도 서울에서 의사로 있는데 이런 어려움이 있군요”

“그래요? 그럼 꼭 지금 이 심정을 말해보세요. 치료하다 못하면 다들 내게 보내요. 심지어 서울서도 보내요”

환자를 치료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돌려보내는 의사의 사명은 이런 상태에선 어떻게 말 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언젠가는 다 가는 것이지만 치료는 안 되고 마지막 가는 모습만을 바라보아야한다면…, 인간은 인간 일 뿐 신의 영역을 어찌할 것인가?

어머니에게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겠지. 카라꽃 보다 더 고울 때도 있었을 것이고 치자 향 같은 젊음도 있었겠지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수선화꽃다발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주변으로부터 축하는 받으셨지 않았을까?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요양원 경내를 산책하리란 꿈은 오래전에 접었다. 하얗게 센 머리 축 늘어진 모습 그리고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 이제 곧 어머니도 하얀 꽃이 되겠지.

항생제와 진통제와 영양제로 마지막 생을 이어가는 어머니에게 남아있는 자식들은 의사가 내미는 연명치료중단동의서에 사인을 하였다. ‘이게 맞는 거죠’ 덤덤히 말하는 의사의 말이 우리를 합리화 시켜줄 수 있을까?

응급실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할 때에 어머니는 채혈하는 간호사의 팔을 내려친다.

“얼마나 살 것고 그냥 가게 놔두라”

유월의 어느 날, 무성한 나뭇잎 위로 천사가 날개를 펼친 듯 사뿐 내려앉은 산딸 나무의 하얀 십자꽃잎 아래서 어머니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던 때가 있었는데….

성당 안 감실 앞에서 백세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고통 없이 편안히 가게 해 주십사 기원해보는 나, 계절이 바뀌면 꽃들이 다시 곱게 피어나듯이 어머니도 건강을 되찾아 오래오래 사시기를 기도하지 못하는지. 잠시 갈등에 빠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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