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는 백년의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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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제주장수복지연구원장/논설위원

새해의 첫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올해로 103세가 되신 김형석 교수님은 백세가 되던 날 아침을 ‘감사와 걱정’으로 기억하신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니, 건강 유지가 걱정이고, 뒤따르는 건망증이 문제였다. 곧바로 반성과 연구에 들어가, 2~3일만에 중대 결정을 내렸다. 더 늙지 말고, 98세로 돌아가 머물기로. 그 해에는 두 권의 책을 썼고, 160여 회 강연을 하면서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남이야 뭐라든 98세가 5년 쯤 더 연장된다면 인생 최고의 행복과 영광이 될 테다. 


이 아침에 102세가 되신 어머니가, ‘숭볼 꺼 어시 모음이 펜안허다(흉볼 것 없이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랴.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감사하라. 그러면 하느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이라 약속한다. 바로 그 얼굴로, 어머니가 새해 아침에 당부하신다. “아프지만 말라 이, 살암시민 살아진다.”라고, 어머니의 일생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4·3을 겪고, 6·25를 살고, 보릿고개를 넘어, 새마을과 사투하다, 드디어 밀감이 들어와 살아진 삶. 김광협 시인의 보름코지 빌레왓디(바람곶의 돌짝밭)와 흡사한 생애다. ‘우리아방 우리어멍 살아생전 고생고생, 보름코지 빌레왓디 정을들연 살아왔네. 이고단이 살터라고 모음정헨 살암시녜’처럼 말이다. 그러니, 새해에는 아프지 말자.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몸을 아끼란다. “너무 저들지(걱정하지) 말고, 서둘지도 말곡. 사름 사는 거 모음대로 안 된다. 싸는 물 이시민 드는 물 이시느네”라고. 생애의 40년을 상군해녀로 사신 어머니는, 깊이 모를 바다에 몸을 던져, 파도 소리에 숨을  죽이며 소라·전복을 캐셨다. 아침에 바다로 나가 서 너 차례 물에 드는 여름철이면, 몸이 새카맣게 말라서 거미가 되었다. 물질은 밥도 물도 삼가야 하는 가혹한 노동. 그야말로 목숨 걸고 하는 작업이기에, 당신처럼 살지 말라는 얘기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거다. 그렇다, 새해에는 몸을 더 아끼자.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대통령께 고마움을 전해 달라’ 하신다. “대통령이 보내준 지팽이가, 나상에는 효재여!”라 하시면서. 지난 가을 노인의 날, 대통령께서 백세 노인들에게 선사한 청려장-장수지팡이가, 어머니에게는 2남7녀보다 나은 효자가 됐다. 눈을 떠서 머리맡의 지팡이가 보이면, 기적처럼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한다. 청려장 덕분에 바깥 출입이 수월해진 어머니는, 진심으로 대통령이 고마운 눈치다. 어디 대통령뿐이랴. 100년을 함께 살아온 이 세상의 모든 동행이 감사하신 거다. 노년에는 외로움이 가장 큰 병이거니. “정옥아, 고맙다 이! 오늘은 이 옷 입곡 손 심엉 교회에 가게, 이!”라는 어머니. 그 손에 장롱 깊숙이 간직해 온 저승 옷이 들렸다. 칠십 즈음 마련해 놓은 수의는 색이 누렇게 바래졌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고향을 떠나 살면서 그 고향을 그리며, 사랑하는 어머니 품 속 같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인가? 나를 키워준 고향의 마을 뒷산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고, 나는 어린 벗들과 그 숲에서 자랐으니, ‘인생은 소나무 숲이 있는 고향’이라는 노교수의 독백이, 이 아침을 울린다. 우리들에게 인생은 무엇인가? 밀감 향기 그윽한 들판이나 사철 아름다운 한라산인가, 아니면 사면의 바다에서 소리치는 파도인가. 


어머니의 봄 여름 가을이 지나 겨울의 깊은 밤에 다다른 시간, ‘다시 한 번만 더 젖 먹던 힘을 내시라’ 응원해 본다. 눈 덮인 보리밭이 더 푸르듯, 생명의 촛불은 마지막이 더 밝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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