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애민 시설 갖춘 독특한 민속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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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정의현 읍치(邑治) 공간인 성읍 고을의 옛 모습

국가민속문화재 산간마을 성읍리
배산임수 명당에 교통 편리 지역

선현 제사·교육 위한 정의향교
일제 강압으로 관청 제사 폐지

▲정의현성을 통해 옛 읍치 공간의 구성 원리를 살피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성읍리는 정의현의 읍치이며 산간마을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독특한 민속 마을이다. 관아가 있던 읍치에는 여타 마을과는 달리 고을의 공간을 채우는 기본적인 요소들이 있다. 객사·아사·향청 등의 관아 시설과, 애민 성격을 띤 삼단일묘(三壇一廟)의 제향 장소, 그리고 풍수적 의미를 지닌 산수와 교통망이 그것이다. 


관아시설에는 무기고를 포함하는 객사(客舍) 시설과 동헌·질청·장청 등을 포함하는 아사(衙舍)시설, 수령에게 자문하던 지역 양반들의 거점인 향청이 있다. 수령이 제사를 지내던 제향의 장소인 3단은 사직단·여단·성황단을, 1묘(문묘)는 성현에게 석전제를 지내는 향교를 말한다. 풍수적 의미를 지닌 산수의 요소로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 교통으로는 다른 지역과의 이동이 편리한 자리에 위치해야 한다. 읍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객사와 아사시설에 해당하는 동헌과 향청이었다.


▲정의현성 관아시설의 흔적을 더듬다


정의고을은 여느 읍치와 같이 ‘우’자 모양의 길을 기본으로 하여 북쪽에 아사시설을 두고 동서쪽엔 동문과 서문을, 남북으론 남문에서 객사를 지나 아사가 있는 곳으로 길이 이어졌다. 가옥을 잇는 좁은 길은 활이 휘어진 모양으로 조성됐고, 여타 읍치처럼 북문은 없었다. 


정의고을에는 객사를 고을 중앙에 두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정기적으로 배례하는 왕권을 상징하는 곳이며, 순행하는 목사 또는 중앙의 관리 등이 묵었으며, 또한 객사에서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중앙의 정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헌과 서헌으로 불리는 익헌(翼軒)이 있고, 익헌은 중앙의 정청에 비해 지붕 높이가 낮다. 객사와 동헌, 그리고 향교는 별도의 담장을 쌓아 공간의 독립성을 갖추었으며, 주 출입문인 삼문과 홍살문을 뒀다. 


정의현 객사에 있던 전패는 일제에 의해 전국의 전패를 없애는 과정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정의향교 유생들에 의해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제작 연대와 보전 이력이 확실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지금은 정의향교에 보전되고 있다. 


객사 서쪽에 향청이 있었는데, 지역 양반들은 향청을 통해 외지 출신인 고을의 수령을 돕는 한편, 향약을 통해 고을의 질서를 도모했다. 향청의 장을 좌수라 하고, 좌수 밑에 몇 명의 별감을 뒀다.

▲여러 차례 수난을 겪은 근민헌과 일관헌


정의현 관아(아사)시설로는 현감의 집무처에 해당하는 동헌(외아)인 근민헌과 질청, 형옥, 무학청 등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관아자리는 1910년대 신작로가 생기면서 두 동강으로 나뉘어 있다. 

600년 수령의 팽나무 아래에 위치한 관아 터에는 2014년 복원된 동헌인 근민헌(近民軒)을 제외하고는 옛 관아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지금의 동향으로 자리를 잡은 근민헌은, 예전의 남향이던 일관헌(日觀軒)을 허물고 새로 지은 건물로, 1975년 제주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근민헌과 일관헌은 모두 역사 기록에 있는 관아의 명칭이다. 영조 때 제주목사 윤시동이 저술한 「증보탐라지」(1765년) 중 정의현청 관아 시설을 열거한 대목에서 동헌을 ‘근민헌’이라 칭하는 글이 등장한다. 


반면에 ‘일관헌’이란 이름은 80여 년 후에 이원조가 편찬한 「탐라지초본」(1842년)에 처음 언급된다. 동헌의 방향과 규모는 사료에서 찾을 수 없고, 여러 번의 화재와 중수를 거치다 보니 원래의 모습을 가늠할 수 없는 형편이다. 


다만 ‘탐라순력도 정의강사(旌義講射)’에 비추어 동헌의 방향을 가늠한다. 2011년 8월 7일 태풍 ‘무이파’에 의해 600년 수령의 팽나무가 부러지면서 일관헌 지붕을 덮치고 이를 계기로 2012년부터 일관헌의 원형을 복원한다. 이때 논란이 된 것이 복원의 기준을 어느 시점으로 하느냐인데, 결국은 더 예전의 기록을 근거로 동향인 건물을 짓고 근민헌의 현판을 단 것이 지금의 근민헌 건물이다. 육지의 동헌은 보통 전면 6~7칸, 측면 4칸인데 비해, 성읍의 동헌인 근민헌은 전면 4칸, 측면 2칸으로, 한 지역을 관할했던 현감의 집무소로서는 왜소해 보인다.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됐다는 ‘전북 태인현 동헌’도 전면 6칸·측면 4칸이다.  


▲정의고을 3단(壇)1묘(廟)의 흔적을 더듬다


삼단일묘는 고을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제향장소로서 고을 수령이 주관하던 국가공인의 제사공간들이다.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신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인 사직단은 정의향교 서쪽 담장 너머에 있었다. 여단은 이승에서 떠도는 혼령(여귀)들이 농사일을 망치지 못하게 농사가 시작할 때 가두고 농사가 끝난 후에 풀어주던 제단이다. 


성황단은 ‘성(城)과 해자(垓字)’를 수호해 고을의 안녕을 지키는 신을 모신 제단으로, 성읍마을 외곽에 위치한 포제동산 아래에 있다. 문묘는 정의향교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에 제향하는 것으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제를 봉행한다. 


제주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의향교는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배향 공간인 대성전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있다. 향교는 1423년 고성리에서 성읍리로 현청이 옮겨지면서 함께 이전됐는데, 향교의 위치는 여러 번 바뀌었다가 1849년(헌종 15)부터 지금의 자리에 있다. 


이곳에 제주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패가 보전돼 있다. 문묘와 마을 포제를 제외한 관청에서 지냈던 제사는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모두 폐지된 이후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글·사진=강문석 (사)질토래비 전문위원·성읍별곡사진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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