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전·가자지구의 그치지 않는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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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팔레스타인 영토 변천의 역사
⑤ 로마의 지배 그리고 파국

유대 왕 헤롯…메시아 탄생 막고자 유대인 영유아 학살
로마제국…학살·추방 끝에 팔레스티나로 지명 변경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곳이 지금의 이스라엘 땅이다. 그러나 빼앗은 땅은 언젠간 빼앗기는 법, 동방의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3개의 대제국이 순차적으로 쳐들어와 빼앗더니 다음엔 서방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앞세운 그리스인들이 새 주인으로 들어와 군림한다. 그리고 등장한 로마제국, 새 지배자를 맞는 유대인들에겐 2000년이라는 기나긴 암흑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BC 63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인의 하스몬 왕조를 멸망시킨 로마는 꼭두각시 헤롯 왕조를 내세워 유대인들을 다스리게 한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신분으로서 유대 왕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로마의 종(從)’으로 취급된 인물이다. 예수가 태어날 즈음 ‘메시아가 나타나 유대의 왕이 된다’는 소문 때문에 두 살 이하 유대인 유아들을 모두 학살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헤롯 왕조


헤롯이 죽고 아들 안디바가 분봉왕이던 시절엔 세례자 요한이 참수되고, 나사렛 예수도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다.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는 예수 열두 제자 중 야고보를 참수해 첫 번째 순교자로 만드는 등 헤롯 왕조의 3대에 걸친 왕들은 예수 및 초기 기독교 수난사와 악연이 깊다.


 헤롯 가문과는 대립적이었던 유대 민족 또한 이후 오랜 세월 유럽 기독교 사회로부터 비난과 수난을 감내해야 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주홍글씨가 새겨졌기 때문이다. 헤롯 3세인 아그립바가 죽자 로마는 헤롯 왕조의 승계를 중단하고, 가나안 지역을 유대 속주(ProvinciaJudaea)로 재편해 버린다. 비록 로마의 하수인에 불과한 헤롯 가문이었지만 그 휘하에서 누렸던 유대민족의 자치권은 이제 박탈되고 로마 총독의 직할로 편입되는 것이다. 


▲1·2차 유대인 반란


제국으로부터 세금 수탈과 종교 탄압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이 결국은 대반란을 일으킨다. AD 66년에 일어나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기록되는 이 사건은 4년 동안 지속되다가 로마 황제 후보인 티투스의 원정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불태우며 최종 진압된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예루살렘을 탈출해 로마 제국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7~800년 전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침략 때의 유배에 이은 세 번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Diaspora)가 이에 해당한다. 이어 반세기 후에는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한다. 이번엔 유대 땅이 아닌 바깥 세상 여기저기에서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와 메소포타미아 등 로마제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2년 만에 겨우 진압은 됐지만 제국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려던 로마는 이 사태로 발목이 잡히며 큰 타격을 입는다. 로마제국 최전성기를 이끈 트라야누스 황제까지도 이 사태를 진압하고 로마로 돌아가던 중 병을 얻어 사망에 이른다. 로마제국으로선 참으로 지긋지긋한 유대인들이었다.  


▲3차 반란과 영구 추방


새 황제에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이 그간 보여온 폐쇄적 신앙 행태와 배타성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1차 유대 전쟁 때 폐허가 돼 60년째 방치돼왔던 도시 예루살렘에 로마식 신도시와 로마 최고의 신 제우스의 신전을 건설토록 명령한다. 이것이 세 번째의 대반란을 촉발시킨다. 


AD 132년에 일어난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은 로마의 대규모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3년 만에 겨우 진압이 되는데, 로마 5현제의 1인이면서 평화주의자로 이름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였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가혹했다. 영구 추방령으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내쫓고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 하게 한 것이다. 유대인 역사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디아스포라에 해당한다. 이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떠돌며 핍박받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1년에 단 하루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방문이 허용됐는데, 그것도 폐허로 남은 예루살렘 성전 터의 서쪽 벽 앞까지만 제한적이었다. 유대인들은 1차 반란 때 예루살렘이 함락된 그날만 되면 서쪽 벽으로 몰려들어서 머리를 대고 슬피 울었으니 오늘날까지 통곡의 벽(Western Wall)으로 보존되는 곳이다. 

▲새로운 지명 팔레스티나


세 차례의 유대인 반란에 대한 로마의 보복은 영구 추방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는 유대 속주의 행정 지명에서도 ‘유대’를 지우고 ‘팔레스티나’로 바꿔버린다. 과거 유대왕국 시절 유대인들과는 원수였던 블레셋(팔레스티나) 사람들의 자그마한 땅, 오늘날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교전이 치열한 가자 지구의 옛 이름이 ‘필리스티아’ 또는 로마식표기로 ‘팔레스티나’였다. 유대인들로선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 이름이 없어지고 인근 지역 원수들의 땅 이름으로 대체가 됐으니 천추에 한이 맺히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땅 전체를 아울러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부른다. 2000년 전 유대인 정체성을 지우기 위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지명 변경 조치가 21세기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전편 보기…

① 창세기, 이스라엘의 기원-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6782 

② 출애굽과 이스라엘 왕국-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7416

③ 왕국의 분열 그리고 멸망-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7590

④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지배-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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