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시작, 그 탐색⑷ 수필의 길, 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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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나는 쉰두 살 나던 해, 뒤늦게 수필의 길에 들어섰다. 문학을 향한 본격적인 행보였다. 


1993년 제주문학상 신인상에 ‘그림 속의 집’이 당선됐고, 몇 달 뒤 이듬해에 ‘눈물의 연유’가 《수필과 비평》에서 신인상을 수상해 중앙 문단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올해가 수필로 등단해 30년이 되는 해로 나이 여든둘의 고비를 돌아 한 살 더 얹게 될 목전이다. 회고는 과거지향적이라서 그런지 하다보면 속절없이 지난날을 자꾸 오늘에 불러들이게 된다. 그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이.


그때는 수필로 등단한 이가 지역에 두, 셋에 지나지 않아 ‘제주일보’에서 신인 얼굴에다 등단지(표지)까지 사진으로 실어가며 축하해 주었던 일이 생생하다. 등단은 기쁨이 차오르고 가슴 뛰는 일이었다. 가족과 친지들의 축하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렸다, 그 감흥은 짙고 오래고 강렬했다. 신바람을 일으키면서 곧바로 글쓰기에 투입된 운동에너지가 되면서 내 문학이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다작이 좋은 글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신념에서 거의 하루 한 편을 써가며 매달렸던 것 같다. 지면이 없던 시절이라 지방지 3대 신문을 넘나들었음은 말할 게 없다. 내 곳간에 글이 쌓이기 시작하자 수필집을 출간한 것은 작품과 작품집의 균형 능력을 시험하는 나쁘지 않은 계기를 만들었던 같다. 초창기부터 ‘삶의 뒤안에 내리는 햇살’, ‘느티나무가 켜는 겨울 노래’로 출간을 이어갔다. 재정적 어려움도 막아 나서지 못했다. 내 글을 읽는 독자 한 사람만 있다면 그를 위해 쓴다는 야릇한 결기가 내 정신의 뼈대를 일으켜 세웠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만용이었는가.


문제가 생겼다. 써도 써도 목이 타는 목마름의 증후가 찾아왔다. 벌컥벌컥 사발 치기로 단숨에 물을 들이켜는데도 이내 목말라 오는 전에 없던 열사의 갈증이었다. 단비에 촉촉이 젖은 풋풋한 마음-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애당초 문학으로 들어가며 수없이 부르던 시. 도시를 떠나 읍내 어디 고요한 숲 속에 둥지 틀고 들앉아 365일 끌어안으려던 그것. 그래서 나는 그적, 갈맷빛 바다를 바라보다 지워진 수평선을 슬퍼했던 것일까.


수필에 서정의 옷을 입히면 시다. 그리 단순한 게 아니지만, 사상(事象)을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인유(引喩)와 수사를 버리고 생략과 암시와 단절의 가쁜 숨결로, 내 걸음이 좀 가팔라도 좋은 것 아닐까. 아직 내겐 날개가 있다. 꺾였지만 수선한 날개, 상상의 하늘 끝까지 날 수 있는 유용한 두 개의 날개가 있다. 쉬면서 날고 걸으면 된다. 파닥이던 날개는 날던 과거만큼 길에 용하다.


여생에 수필과 시 두 장르를 더불고 싶다. 수필에 시적 정서를 혼융하면, 서술과 운율의 결합으로 두 장르를 절충한 퓨전문학이 되지 않을까. 


길어도 반드시 시가 들어가게 정겹고, 짧아도 느슨히 호흡할 최소의 여백이 품을 벌리고 있어 나를 끝까지 글쟁이로 살게 할 시와 수필의 끈끈한 만남. 이를 일러 시수필이라 하면 좋지 않을까. 


시와 수필이 동행하는 길이면 된다.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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